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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Jan 28. 2016

혁명의 배반과 파국의 윤리,
<디스 디스토피아>

계간 한국희곡 , 2015.봄.

작/연출 : 구자혜

출연 : 윤현길, 이리, 장윤실, 박경구, 조경란, 조위상, 전박찬, 최순진

일시 : 2015년 2월 4일 ~ 2월 8일

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디스토피아라는 무대



  여기 어떤 ‘세계’가 있다. 언제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각자 다른 꿈을 꾸는 인간들만이 남겨진 황무지와도 같은 세계가 남겨져있다. 적당한 이름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은 각자가 속한 세대를 대변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때로는 아들과 딸로 각자 분화되어 말 그대로 언저리가 되어간다. 

  이것이 구자혜 연출이 무대 위에 그려낸 세계의 풍경이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세계에 남겨진 인간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직설적이면서도 때로는 난해하게 관객들을 관통한다. 혁명을 꿈꿨던 1세대와 이전 세대의 방식에 반감을 가진 2세대, 그리고 남겨진 3세대. 이들은 모두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동시에 구자혜 연출은 이 연극마저도 실패로 귀결될 것임을 예감하며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실패를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디스 디스토피아>의 추동력을 어떻게 읽어야할까. 이 연극에 대한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구자혜 연출이 밝히고 있듯이 무대 위의 세계는 혁명이 사라진 꼰대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조금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문지방을 밟는 것도, 밤에 휘파람을 부는 것도, 밥상머리에서 다리를 떠는 것도 허용되지 않던 세계가 현재의 세계라면, 그것이 목소리로만 남아버린 세상이 <디스 디스토피아>의 세계이다. 세계 곳곳에서 세대 전쟁(Generation Warfare)이라는 표현이 일상처럼 받아들여지는 지금 이 시점에 무대 위의 디스토피아는 현실과 접점을 가지지 못하는 예술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답답한 꼰대와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 간의 전쟁은 이제 겨우 첫 번째 스테이지에 올랐을 뿐이다. 세 세대 간의 혼란과 갈등은 실패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거니와 그 자체로 현실과 매개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더불어 짧은 여행의 귀착점이 파국이라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3세대가 떠올리는 기억과 대응방식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파국의 상상력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디스 디스토피아>의 난해한 대답을 듣는 방법은 속도와 파국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과하는 것이다. 실패의 예견과 혁명의 기대 안에서 <디스 디스토피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 난해한 질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혁명과 멸망의 변증법



  1세대가 꿈꾼 것은 혁명이었다. 무엇으로부터의 혁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혁명은 완수되어야만 한다. 때문에 1세대는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라켓을 휘두르고 스스로를 고독에 가둔다. 하지만 고독은 섹스를 낳고, 섹스는 아이를 낳았다. 1세대는 혁명에 헌신해야했기에 현실에서는 무능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인 언저리는 그렇게 1세대에게 거부당한다. 

  2세대는 1세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2세대에게도 혁명은 중요한 것이지만 투쟁의 방식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들에게 라켓은 일종의 유희와 연결되어 행위이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의 고독함을 이겨내기 위한 정당한 유희, 이것이 2세대가 가지는 섹스의 이유이다. 또한 1세대와 달리 2세대는 아이들의 울음부터 규제를 가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원했고, 처음부터 조숙한 아이를 만들어간다. 삶의 질이라는 차원에서 넷째는 다시 거부되고 언저리로 남게 된다. 

  1세대와 2세대의 반복되는 삶 가운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쾌락의 유무가 아니라 콩과 팥에 대한 인식을 달리 했다는 것이다. 1세대의 고민이 콩 심은데서 팥이 나오는 것이었다면, 2세대의 걱정은 콩 심은데서 콩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혁명은 다시 정의되어야한다. 이들에게 혁명은 다른 것이 아닌 또 다른 삶에 대한 기회의 획득이다. 각자의 세대가 형성되는 원리는 혁명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갖게 되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이들이 발화하는 ‘혁명’이라는 기표에 의해서이다. 1세대와 2세대의 차이는 다음 세대를 어떻게 주조해갔냐 이다. 1세대의 고독이 우발적인 섹스와 방임된 자식들을 낳았다면, 2세대의 고독은 철저하게 계획된 섹스와 교양을 통해 완성된 자식들을 낳았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1세대와 2세대의 혁명은 지극히 속물(snob)적인 것이다. 

  3세대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혁명을 사적인 영역으로 치환하여 강요하는 부모세대에게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다른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아이들은 이미 고추에 털이 났고, 가슴에 휴지를 넣으며, 허벅지를 그어 생리하는 흉내를 낼 정도로 조숙해있지만 어디까지나 실재의 세계를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다. 이들은 섹스를 할 수 없으며 죽을 수도 없는 세계의 틈새에 갇혀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을 추구하던 기성세대의 바람과 달리 신세대에게 혁명은 상상할 수 없는 그저 기성세대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가상일 뿐이다. 1세대와 2세대는 지진을 혁명으로 착각하여 뛰쳐나갔지만, 3세대에게 혁명은 모든 것이 무화된 멸망의 시간에 가까울 뿐이다. 지진이 다가왔을 때 그것의 무의미를 눈치채는 것은 오로지 3세대이다. 그것이 디스토피아에서 3세대만이 살아남는 이유이다. 

  실패만이 예견된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구자혜 연출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혁명의 반작용으로 실패가 아닌 멸망을 끌어들인 것은 혁명이 가지는 근본적인 힘,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자유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고민이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은 창조가 가지는 힘을 파괴로 되묻는 가능성의 지점들을 내포한다. 1세대와 2세대의 뒤틀린 변증법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단지 그것을 멸망으로 바꾸어 새롭게 던져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구자혜의 실패가 건내주는 성공에 대한 진정한 변증법적 대답이다. 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응시하는 것, 이것이 3세대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실패의 윤리



  마침내 세계의 혁명이 도래한 무대는 파국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 그 세계의 중심에서 3세대들은 자신들이 지켜야했던, 들어야만했던 목소리들을 떠올린다. 언제나 3세대들을 옭아매던 목소리, 말하자면 문지방을 밟는 것과 밥을 먹고 눕는 것과 밤에 휘파람을 부는 것과 밥상머리에서 다리를 떠는 것에 대한 강력한 금기 등을 떠올리는 것이다. 발화의 주체를 잃어버린 목소리들에 불과하지만 3세대들에게 이 목소리는 여전히 현존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이 금기를 되새기며 두려워하던 3세대들은 어른들의 기억을 더듬어간다. 어째서 금기가 사라진 세계에서 3세대들은 뺨을 맞던 기억을 되새기는 것일까. 이들은 금기를 뛰어넘는 욕망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금기를 흉내내는 것만이 이들에게 허락된 욕망이다. 

  때문에 3세대의 쾌락은 섹스가 아닌 일종의 롤 플레이(role play)로 귀결된다. 욕망을 흉내내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쾌락이자 상상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혁명은 성공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패한 혁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1세대와 2세대가 가질 수 없기에 혁명은 성공했지만 3세대에게 혁명은 그저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다시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3세대에게 혁명이란 그저 파국의 되물림과 같은 것이다. 이제 태어날 새로운 세대는 존재하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꼰대가 되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들의 혁명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비관적인 미래를 암시한다.

  구자혜 연출은 ‘연출의 글’에서 <디스 디스토피아>가 현실의 재난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어른들은 혁명을 외치느라 아이들을 방치했고, 아이들은 지진 속에서 죽어갔다. 

  물론 <디스 디스토피아>가 그려낸 혁명은 어른들을 죽이고 아이들은 살아남았지만, 무대 위의 혁명은 현실에서 재난이 되어 파국의 형태로 현시되었다. 아이들은 죽었고 어른들은 여전히 혁명의 롤 플레이를 흉내내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욕망을 그저 반복하며 자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국의 윤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실인지 픽션인지 모르는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앞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저곳에서 재난은 터져 나오고 있고 공허한 외침은 반복되어 울리고 있다. 

  다시 묻자.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구자혜 연출이 던진, <디스 디스토피아>가 던지는 것들은 윤리적인 질문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정녕 끝은, 혁명은 우리 앞에 어떤 형태로 도래할 것인가. <디스 디스토피아>의 윤리적 질문은 분명한 실패로 회귀하고 있다. 그것이 예술이라는 형태의 파격으로 회귀하든, 관객과의 소통 실패로 회귀하든 이 실패를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실패에서 우리는 이 시대만의 윤리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파국의 윤리는 실패의 바닥을 더듬는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축복된 행위조차 윤리적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현재의 시점에서 디스토피아의 무대(Dystopian Stage)는 그야말로 새로운 무대(New Stage)에 가장 적합한 ‘실패의 형식’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도달한 종착점 역시 실패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부디 우리 모두 잘 실패하자. 그리고 그 실패의 끝에서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있으며,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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