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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May 21. 2019

영화, 환상과 현실의 변증법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테리 길리엄, 2018)

환상의 환상


  환상과 현실은 교차해야만했다. 테리 길리엄이 20년의 시간을 지나 완성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영화라는 교차로에서 인생이 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고의 인기를 달리는 영화감독 토비(아담 드라이버)는 광고촬영을 위해 스페인을 방문하던 중 자신이 학생 시절에 찍은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DVD를 보게 된다. 상사의 아내 재키(올가 쿠릴렌코)와 불륜관계를 저지른 토비는 위기를 모면할 작정으로 영화를 찍던 마을에 도착하고 배우로 출연했던 마을사람들과의 재회가 이 영화의 주된 서사다.


  흥미롭게도 토비의 마을 도착과 더불어 돈키호테의 환상은 다시 시작된다. 평범한 구두수선공(조나단 프라이스)은 자신을 돈키호테라 생각하며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재연한다. 강도로 오해받아 경찰에 연행되던 토비는 돈키호테에 의해 구출되고 반강제적으로 산초 역할을 떠맡게 된다.

  영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듯한 돈키호테의 모험을 토비의 눈을 통해 따라간다. 영화의 대사를 읊으며 자신이 감독한 장면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돈키호테를 따라 토비는 모로코 난민촌, 버려진 금광, 알렉세이의 성에 차례로 도착한다. 돈키호테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사들과 만나고 버려진 금화를 찾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토비는 자연스럽게 돈키호테의 환상과 대면하게 된다. 일종의 버디무비와 같은 구성을 가진 이 영화는 토비를 돈키호테의 환상 한 가운데로 몰아넣으며 그가 의도적으로 구획했던 영화의 순간들을 현실로 옮겨놓는다. 성공한 토비가 자신의 첫 영화를 기억 못하듯 현실은 환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끝끝내 토비를 스페인의 광야 속에 몰아넣는다. 철저하게 돈키호테를 거부하던 토비가 광야를 헤매며 만난 사건들은 그가 알고 있던 세계가 돈키호테의 꿈과 만나는 현장을 목격한 것과 다름 없는 모험이었다.

  알렉세이의 궁전에서 벌어진 연극은 그의 환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돈키호테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알렉세이는 그 환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 무대를 연출한다. 배우들과 스탭들을 섭외해 사악한 마법사를 퇴치해달라며 돈키호테를 부추긴다. 마법사를 쫓아 우주까지 승천하는 돈키호테의 모험은 연출가 알렉세이의 비웃음으로 허구임이 폭로된다. 그럼에도 이 시퀀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환상이 서로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비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공주의 저주를 풀기 위해 기꺼이 우주로의 도약을 불사하는 돈키호테의 모험은 알렉세이의 연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돈키호테가 마법사를 무찌르고 안대를 풀었을 때 고스란히 노출되는 스태프들과 무대 연출 장비들은 17세기의 그가 21세기의 환상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영화(무대)가 현실과 환상의 교차로임을 가장 고양된 형태로 증명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종국에 이르러 돈키호테를 죽인 토비는 스스로 돈키호테의 모험을 이어가는 것으로 영화적 현실을 수용한다. 물론 이 환상은 영화라는 모두의 꿈이 다시 한 번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테리 길리엄의 선언문인 셈이다.



현실의 현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토비가 떠난 이후 모두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이 변화는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치러야했던 대가였다.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돈키호테는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공주를 구하고 거인을 물리치는 꿈을 현실에서 경험한 그에게 구두를 수선하는 삶이란 지루하고 평범한 삶이었을 것이다.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를 마을사람들이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영화가 투영되는 작은 방에 갇혀 돈키호테의 대사를 반복하며 그의 산초를 기다렸을 것이다.

  한편 토비를 통해 영화배우라는 꿈을 본 소녀 안젤리카는 마드리드로 떠났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꿈을 찾아 떠난 도시에서 가난한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토비가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하는 사이 안젤리카는 마드리드의 밑바닥을 전전하다 알렉세이라는 러시아 재벌을 만났을 것이다. 학대를 받으며 그의 소유물이 된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환상이란 비루한 현실의 연장임을 깨닫고 순응했을 것이다. 토비를 다시 만나기전까지는.

  토비를 통해 영화라는 환상을 목격한 이들에게 비루한 현실로의 안착은 용납할 수 없는 삶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이 재회했을 때 영화는 이들을 구두수선공과 안젤리카가 아닌 돈키호테와 소녀의 만남으로 그려낸다. 토비가 직접 썼던 대사를 주고 받으며 서로가 상실한 환상을 공유하는 이 시퀀스는 삶이 드라마타이즈(Dramatize)되어버린 사람들의 남루한 현실을 그린 장면이다. 결국 현실과 환상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은 알렉세이의 성에서 돈키호테가 경험한 모험을 통해 폭로된다. 숭고한 사명을 띠고 우주에서 마법사와 대결한 돈키호테가 초라하게 목마에서 내려와 바닥을 청소하는 장면은 현실 뒤에 가려진 영화(무대)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잔인한 장면이 된다. 마찬가지로 종국에 돈키호테틀 살해하고 스스로 돈키호테가 되어버린 감독 토비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화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테리 길리엄의 자기 해석과도 같다. 그 자신의 운명 역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환상은 곧 현실을 토대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비루하고 초라한 일상에서 화려하고 낭만이 넘치는 세계로의 도약,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영화였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넘나들며 영화의 존재를 긍정하는 테리 길리엄에게 돈키호테는 분명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17세기의 이야기와 21세기의 이야기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실과 환상이 뒤엉켜있는 삶에서 여전히 예술은 간극을 도약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테리 길리엄의 모험은 죽어가면서 구두수선공이었던 자신을 기억하는 장면에서 마침표가 찍힌다. 노인이 영화 내내 고수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초라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영화라는 예술의 종말을 맞이했을 때 테리 길리엄이 할 수 있는 자기고백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비가 부와 명예를 버리고 지독하게 반복될 돈키호테의 삶으로 뛰어 드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영화의 종말(아마도 그것은 개인의 종말과 일치할 것이다)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세계에 다시 뛰어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운명이 그러했듯 영화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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