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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Oct 24. 2022

여성을 도려내고 싶은 마음

직장 생활 8 차인 지금도 사무실에서 막내다. 그런데도 막내 살이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막내니까 00씨가 총무해요~"라는 말을 들었을 , 이게  소린가 했다.   해는 그래야 하는  알고 했고,  이후로는 그런 공이 넘어왔을때 모두의 시선이 쏠려도 입을  다물고 있거나 "제가  관리를  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총무는 잘하면 당연하고  하면 볼멘 소리를 듣기 쉬운 자리라는  알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동료들은 "신규같지 않아~"라는 말을 했고 처음에는 칭찬으로 듣고 좋아했다. 반은 칭찬이고 반은 막내 노릇  하고 되바라진다는 의미라는걸 깨닫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걸 깨달을 정도의 눈치가 생길때쯤, 사람들은 이미지에 익숙해지면 포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내답지 않고 딱딱한' 이미지를 선점하면 처음에는 수근거리던 사람들도 점차 그러려니 하고 쉽게 대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전체 회의에서 동의하지 않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몇번 말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긴다. 물론  의견은 거의 먹히지 않지만,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은 ' 쟤는 건드리면 안되겠다' 생각한다. 무적의 대사도 있다. "그건  아닌  같아요." '' '같아요' 붙어있는  말랑한 말도 막내가 하면 유교의 자손들을 깜짝 놀래킬  있다.


하지만 자주, 너무 내 멋대로 사는 건가 하는 고민이 든다. 아닌 일에 아니라고 말하고, 알아서 기지 않는 직장인으로 사는게 왜 이렇게 두려울까? 아빠는 명절에 내가 친척 어른들에게 하는 걸 보고 그래서는 회사 생활 못 한다고 했다. 분명 '문제'가 생길 거라고. 띠동갑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친척 오빠의 신붓감이 없냐고 떠보는 고모에게 "고모, 나이 차이가 얼만데요. 제 친구들은 너무하죠."라고 말하고 나서다. 명절에 손 하나 까딱않고 있는 친척 오빠들에게 반찬을 나르라고 말하고, 인맥을 이용해 더 나은 근무처로 옮겨줄 수 있다고 허세를 떠는 큰아빠에게 "지금은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 드릴게요. 제가 감당할 수 있어요."라고 말해서다. 결혼과 연애에 대한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지금은 결혼 생각 없어요"라고 해서.


한국 사회가 신봉하는 속담이 하나 있다. '여대생들은 회사 생활을 못 한다.' 이기적이며 공동체의 일에 눈치를 보며 쏙 빠지기 때문이란다. 사실은 까라면 까지 않기 때문이고, 똑똑하고 제 할 말을 하는 여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겠지. 여성은 어떤 자리에 있건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다. 직접 부딪치기보다 부드러운 표현과 재치로 상대가 불쾌하지 않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선배의 개소리도 적당히 받아칠 줄 아는 센스 있는 동료가 되어야 한다. 사무실에 있는 불특정다수를 향해 던진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이어폰을 꽂으면, '쟤는 사회생활을 못하네'라는 말을 듣는다. 일일이 반박하려는 마음을 참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건 상상하지도 못하고 '감히' 선배가 말하는데 이어폰을 꽂는게 괘씸한거다.


또래 남성도 나만큼 '너무 세게 말했나'를 빈번하게 걱정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 성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나는 얼마만큼일까. 여성을 빼고 나를 보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아빠가 회사에서 내 모습을 본 적도 없으면서 어두운 미래를 운운할 수 있는 건, 50대 남성은 마땅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위가 있으며 20대 여성인 딸이 자신의 말을 새겨 들어야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게 세계의 질서니까.


대학시절에 한 교수님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비싼 안경과 개성있는 착장을 한 50대의 키가 작은 여성이 학교에서 가장 큰 교실에서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수업을 했다. 그를 너무 좋아해서 전공과 하나도 관련이 없는 북한학 수업까지 들었다. 어느 날 교수님은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며 투덜거리다가 "나는 싱글이니까 그정도 지불해야지 뭐." 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그 말이 너무 너무 멋졌다. 자식과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고 여유로운 중년 여성을 처음 보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가 없는 산뜻한 태도가 너무 멋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분이 걸어왔을 시간을 생각한다. 그가 얼마나 많은 질문에 답하며 살았을지를. 부당하다고 느낄만큼 많은 세금을 보고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감정의 씁쓸함을 느낀다. 그도 자신과 여성을 떨어트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까.


사회생활 못하는 막내로 사는 것은 괜찮다. 맞아, 나는 좀 세지 하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남성 동료들에게 더 부드럽지만 개인적인 호감은 없는 정도로 말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다르다. 슬프고 화가 난다. 누군가는 슬플 시간이 없다고, 소리를 높이고 화를 내라고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러나 기쎈 여대생이 아니고 싶은 마음과 왜 그렇게 살면 안되는지를 납득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가만히 보고 싶다. 질서를 부수기 위해 화를 내기에 앞서 여성을 도려내고 싶은 지금의 마음을 애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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