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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Oct 24. 2022

보호자야, 정신차려

혼자서 수술하기

의사의 입에서 바라지 않던 '끊어지다' 단어와 피범벅이 되어 뭉개진 mri 사진을 보았을 , 바로 물었다.

"한 달 뒤에 해외 나가야돼요. 저 나갈 수 있어요?"

'명예' 자가 붙은 의사는 잠깐 생각하는듯 하더니 출국일을 물었다. 한 달, 딱 한 달 남았다.

"음... 가면 되죠. 걸어서만 나가면 되는거죠?"

끄덕끄덕.

"젊으니까 재활하면 돼요."

그 말을 듣자마자 파견지의 관리자에게 연락을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축구를 하다가 좌측 전방인대가 파열되어 수술 후 재활 치료를 받고 예정보다 조금 늦게 출국하게 될 듯 합니다. 심려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오늘 오후에 바로 수술 가능하죠?"

"네."

"그럼 조금 이따 봅시다."


이건 보험이 되겠지. 간호사가 절뚝거리며 온 나를 휠체어에 앉히고 상담실로 데려갔다. 금액과 수술 방법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인공 관절이 얼마 짜리인지를 들었다. 이해가는게 잘 없었지만 애써 이해하는 척을 하면서 수없이 되뇄다. 보호자야. 정신 차려.


"바로 입원하실거죠?"


간호사가 물었다.

직장에 이 일을 알리고 근무를 위해 필요한 일거리와 입원 기간 내내 입을 속옷 등을 챙기러 집에 가야했다.


"직장에 알리지를 못해서요. 챙길 것들도 있어서.."

"그럼 10시 반까지는 오실 수 있어요?"


한시간 반, 여기서 직장까지는 30분. 집까지는 15분이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네. 그때까지 올게요."

"보호자님은.."

"혼자에요."


야무지게 대답하고 간호사가 건네는 부목을 받았다. 아직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냥 디딜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왼다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운전을 할 수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다.



#



마취에서 깼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무통 링겔을 마구 눌렀다. 갖은 욕설과 아프다는 말이 한데 뭉쳐서 나왔다. 4인실은 3인의 환자와 1인의 보호자로 빽빽하고, 마취에서 깬 시간은 새벽이라 웅얼거리는 수밖엔 없었지만.


약이 잘 듣는 편이다. 생리통도 한 알, 피부 발진이 심할 때도 스테로이드 하루 두 번, 딱 정량을 먹으면 바로 가라앉는다는 것이 면역력 약하고 잔병치레 잦은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었는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진통제가 맞아? 맞다고? 좀만 더 참아보자. 하나, 둘... 진짜 한계다 싶을 때 눈을 떴는데 3분이 지나있었다. 3분? 3분?????



벨을 누른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딱 싱글 베드 침대만큼이다. 밥을 먹고 이를 닦거나 소변을 보러 가고 싶을 때도 벨을 눌러야 한다. 혼자서 휠체어를 끌고 화장실까지 갈 수 없다. 거지같다. 100미터쯤 되는 거리를 걷지 못해서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간호사님의 힘을 빌려야한다. 오줌을 싸고 이를 닦을 때마다 죄송스럽다. 휠체어에 스스로 올라타고 싶지만, 매번 다리가 침상에 걸리거나 어딘가에 병원 옷가지가 끼어서 실패한다. 굴욕적이다.


시간은 정말 길다. 하체 수술을 하면 다리를 심장보다 높게 올리고 얼음 찜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허리에 무리가 온다. 그러다 허리까지 다치기 때문에 하루 두 번 물리치료를 받는다. 마치 창조 경제 같다. 하지만 그때만 층을 옮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때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나도 쓸모가 있어. 쓸데없이 잘하지도 못하는 축구를 하다가 욕심내서 모든 걸 망쳐버린 인간이 아니야. 그런 말을 되뇌이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침대에서 누워서 당시에 좋아하던 한 아이돌 가수의 컴백 무대를 미친듯이 돌려본다. 할 일이 없으니까 스케줄 후기를 모조리 읽고 또 읽는다. 손목이 나갈만큼. 한참 그러다보면 기분이 이상하다. 그들은 너무나 반짝반짝 빛나고, 나는 비참할 만큼 초라하다.


엄마는 기어코 그 말을 했다.


그러게 왜 축구 같은 걸 해서는!


엄마는 또 그 말도 했다.


그 몸을 해서 태국엘 어떻게 가니.


짜증나게도 스스로 수천번 스스로 물었던 질문이다.

네이버에 검색한다. 전방 인대 파열 후 회복 기간.


뭘 읽어도 최소 3개월 이상이라는 답이다.

하루에 한 번, 스치듯 왔다 가는 명예 교수의 말에 의심이 간다. 지 일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한 거 아니야? 나는 지금 혼자서 변기까지도 못 가는데 방콕을 어떻게 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마지막 수업이라고 나가서 승부욕을 불사르다 결국 나자빠진 내가 밉고, 이 와중에도 방콕에 가려는 무모한 내가 싫다.


모든 일을 통제하고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혀있었지만 사실 매일 망하는 꿈을 꿨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그럴줄 알았다는 말을 듣다 깼다. 죽는 것보다 실패하는 게 더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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