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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May 27. 2022

오늘의 최선

제대로   연애가 끝나고 나를 가장 미치게 했던건 냄새. 걔의 체취였다. 거의 2주간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는데 하루는 꿈에 걔가 나왔다. 나를 안은 목덜미에서  냄새를 맡았다.  순간 잠이 깼다. 너무 생생해서 놀랐고, 그리워서 목놓아 울었다.  떠났고 냄새는 사라지고. 아무 것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칠  같았다.

이번 연애가 끝났을   냄새를 그리워할 거라는  알았다. 다행인  우리집이  데이트 장소였다는 거다. 걔가 남겨둔 옷가지가 많았는데 하나도 돌려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냄새가 지워질까봐 입을  없었는데 어차피 꺼내어 킁킁거릴거면 입어버리자 싶었다. 세탁을  번하고 냄새가 지워지고도 너무 편해서  옷을 가지고 태국에 왔다. 이제는   같아서, 얼마 전에 ' 맞다. 이거  옷이었지.'라고 생각했다. 그다지 서럽지 않았다.

자동재생처럼 떠오르던 생각이 애써야 나고 이별 노래를 들어도  감흥이 없어진  헤어지고 1년이 지나서였다. 안심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같던 마음도 1년이면 되는구나.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된대도 나는 같은 속도로 이별의 유효기간을 보낼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눈이 퉁퉁 붓게 울며 이별하는 순간에도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


"너는 꾸미면 정말 예뻐. 좀만  꾸며봐."

그걸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다니. 연애의 마지막 순간 오가는 말이 얼마나 오래, 깊게 남는지 걔는 알았을까. 알았어도 같은 말을 했을까. 짜증나게 눈빛까지 진심이었다.


그런데 나는  1년이 지나도록  이야기를 쓰지 못했을까.

걔를 잊는 동안-  후로도 거울을 보며 꾸며야 하나 생각했던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꾸몄다면 이별을 막았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그토록 좋았던 사람이 개소리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다. 네가 페미니스트인건 상관없지만 나한테 강요하지는 , 라는 말이나 백인이 인어공주를 맡지 않아서 어릴  환상이 깨졌다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었단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사랑했던 기억은 점점 흐려지는데 스스로에게 갖은 변명을 늘어 놓으며 이별을 유예했던 순간들은 또렷하다. 자책감까지 이별에 포함되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

방콕에 처음 온 작년 하반기, 처음 하는 일과 동료들의 냉대와 걔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떠나려는 그 모든 게 겹쳤을 때. 아침에 눈을 뜨면 죽고만 싶었다. 죽고 싶다는 것도 적극적인 행위니까, 사라지고 싶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수영을 했다. 숨을 쉬려고 아등거리다 보면 살고 싶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때, 숨이 자유롭지 않을 때 오롯해질 수 있었다. 나만 생각하고 나로 존재했다. 매일 퇴근 후 수영을 했다. 넝마가 된 몸을 일으켜서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갔다. 물 안에서는 씩씩해졌다. 일부러 발이 닿지 않은 채로 바닥에 몸을 닿게 했다. 몸을 거꾸로 세우기도 하고 무겁게 눌러 엉덩이로 수영장 바닥에 앉았다. 그러면 내 처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부력으로 떠오르는 몸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올라올 수 있구나. 한시간 정도 발버둥을 치고 나면 배가 고팠다. 저녁을 천천히 씹으며 여전히 나도 세상도 싫지만 오늘 사라지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물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때는 명상을 했다. 매번 꺽꺽 울면서 끝났다. 좁은  안에 나랑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욕도 하고 위로도 하며 혼자서 북치고 장구를 쳤다.  스무번  울고 나니 이만하면    같았다.​


 이야기들을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요즘 말버릇이다. 작년에 고생한 이야기 지긋지긋해. 이제 그만 말할 거야.

 연인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 그만 떠올릴 거야.

다짐하는 동안은 강해진 기분이다. 과거의 상처나 기억을 자력으로 어떻게   있을  같다. 입만 열면 나만 피해자라는 사람은 되게 별로니까,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또 쓸 것이다.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아직 생각한다는 의미이므로. 나로서 온전하지 못했던 기억은 언제 어디서고 튀어 올라 괴롭겠지. 고독을 견뎌야 했던 시절의 설움과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로맨스의 환상을 믿고 싶어하던 내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가 가시지 않아 누군가에게 떠벌리는 마음도 몇 번의 다짐으로 사라질 리 없다. 때로는 이 반복이 너무 뻔해서 괴롭다.

하지만 지난 1년 간 절대 쓸 수 없었던 말을 쓰고, 내 입으로 읽으며 다시 상처를 입는 이 과정도 성숙이라고 우겨본다. 더 나은 선택은 없다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받아들인다. 지금 당장 오롯이 설 수 없는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내버려 두지 않는 마음. 이것이 오늘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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