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지금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어릴 적, 낮에 잠깐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해가 진 저녁이었고 집안에 늘 있어야 할 엄마도 없고 아무도 없던 때, 나는 현실과 지구를 떠난 듯한 기분이었다.
커서는 만취해 겨우 집에 기어 들어와 잠든 다음날, 숙취에 눈을 뜨니 사방이 어색해 보이는 내 방, 이 또한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만취했던 상황을 복기할 수 있는 건 술자리에 같이 있던 친구들 뿐이었던 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달력을 보니 내 생일 며칠 전이었고 친구들이 잔뜩 안겨준 선물들이 떠올랐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건 두 가치 남은 88 라이트 담배와 라이터뿐.
적어도 술꾼이라면, 만취 또는 대취해 기억의 순간들이 모조리 지우개로 지워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아니리라 믿고 싶었을 것이다. '살인자ㅇ난감'의 이탕(최우식)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다. 학교에서 친구와 투닥거리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얼마 후 떠날 워킹 홀리데이 생활에 기대가 부풀어 있다. 신앙심이 깊은 엄마는 잔소리꾼이고 무관심한 아빠에,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누나는 전처럼 구박해 대기 일쑤다. 그러던 그가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아니 우발적이었다.
퇴근길, 편의점에 왔던 진상 손님이 길에 쓰러져 있어서 걱정이 되던 터에 일행이었던 친절하고 순해 보이던 아저씨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갑자기 무자비하게 날아오던 욕설과 주먹을 피하고 멈추기 위한 정당방위였을 뿐이다. 그렇게 살인은 어처구니없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황하고 있던 그의 앞으로 시각장애인 여성과 안내견이 지나간다. 시각장애인이니 상황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다음 날 편의점으로 찾아와 협박을 하며 돈을 요구한다. 겨우겨우 돈을 구해 그녀의 집에 도착했는데, 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그녀. 어렵사리 구한 2백만원을 건네니 한다는 소리가 "매월 2백. 내가 얘기 안 했나?"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넷플릭스에서 2월 9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살인자ㅇ난감'의 초반부 이야기다.
도망자가 된 이탕, 그를 쫓는 손석구, 이탕을 돕는 노빈. 또 이탕을 찾는 송촌. 그들이 뒤엉켜 이야기는 얽히고설키게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백범 김구를 시해한 것으로 유력시되는 사람을 백범선생 사후 수십 년 만에 그가 말한 '정의의 몽둥이'로 사망케 한 분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으로 일정 부분 인정되는 사안이라도 개인적 응징은 처벌대상이라는 이유로 사법처벌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과연 누가 악인이고 누가 영웅인가. 드라마의 포스터는 묻고 있다.
*가장 기억에는 남는 대사는 손석구의 동료 경찰역으로 나오는 현봉식(본명 현보람) 배우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떡이며 졸고 있는데 지나가던 팀장이 하던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