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숙취였다
빨간 소주 줄까 파란 소주 줄까
스무 살에 술을 배우기 시작해서 1년 뒤부터 본격적인 술의 인생이 시작된 나의 청춘. 그때는, 세상에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저녁이면 어떻게든 술자리를 만들었고, 새벽이 되어 가족이 곤히 잠들었을 무렵이 되어서야 귀가하곤 했다. 멀쩡한 정신으로 깨어있는 시간이 두려워서였을까. 방황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취하기 위해 마셨고 술자리를 즐긴다는 소리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뿐이었다. 3차는 기본, 7차까지 마신 적도 있으니까. 심지어는 집에 갈 차비까지 끌어모아 술을 마셨더랬다. 주종 불문, 시소 불문, 두주불사, 그때 내 인생의 모토이자 캐치프레이즈, 슬로건이었다.
당시 나는 방배동에 살았는데 여러 친구들 중 양재동에 사는 친구와 둘이서만 만든 사조직이 술자리의 멈춤은 없다는 뜻의 '노 브레이크'였다.(지금은 역사 청산으로 해체되고, '인생 뭐 있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노 플라블럼'이 새로 발족했다)
한 번은 대취하여 말죽거리(그때는 양재동을 말죽거리라고 불렀다)에서 집에 가려고 서있는데 친구가 닭발에 딱 쐬주 각 일 병만 하자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다가왔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콜. 리어카 좌판에 호롱불을 켠 지붕도 없는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백 원짜리 닭발을 한 손에 들고 5백 원짜리 25도 진로소주를 맞은편 손으로 든 채 노상에서 병나발을 불기도 했다. 그리고는 남부순환도로를 따라 도보로 귀가.
대한도 놀라서 도망간다는 소한 추위. '노 브레이크' 친구의 전화. "잠원 고수부지로 나와." 먼저 나와있던 친구 옆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고, 그 안에는 소주 네 병과 새우깡이 하나 있었다. "마셔." 소한 추위에, 그것도 한강 바람을 맞으며 소주 병나발을 부는데, 문득 소주 네 병을 마시려면 새우깡 한 봉지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해서 새우깡 봉지를 살짝 뜯어 찢어진 곳을 움켜쥐고 내용물을 죄다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고개를 돌려 내 행동을 보던 친구 왈. "너란 놈은 참..." 알고 보니 친구는 첫사랑 연인과 헤어졌다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나는 목하 열애 중이었는데)
철없던 시절을 보내느라,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공부도 책도 멀리한 채 청춘을 소주에 저당 잡혀 살았더랬다. 나이를 먹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고 금쪽같이 아까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가끔씩 떠오르는 그때의 추억들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도 술을 즐겨한다. 전처럼 취하도록 마시기보다는 술자리에 함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웃어주기도 한다. 요즘은 주로 선배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는데, 다음 날 아침이면 총무 형님이 꼭 전화를 하셔서 전날의 술자리를 복기하신다. 몇 차까지 갔는지, 누구누구는 언제 집에 갔는지, 몇 차 술값은 누가 냈는지.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에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리고 나면 어제의 술자리는 비로소 마무리된다.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 들으면 경천동지 할 얘기지만, 나는 한때 366 클럽 회원이었다. 1년 365일도 모자라 366일을 술을 마시자는 모임이었다. 예전엔 내가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엔 술이 나를 마시는 형국이었다. 아직까지는 술을 아예 끊을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는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오붓하게 옛이야기 나누며 오가는 술잔 속에 정을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다. 술이 싫다고? 그러면 맹물이라도 같이 마시며 얘기할 용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술을 마시건 마시지 않건 사람은 돈으로도 만들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빨간 소주
파란 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