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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x Mar 21. 2021

징크스에울지 마

나는 웨이드 보그스도 아니건만, 늘 징크스에 시달려야 했다.

친구들과 놀러 가면 감기 몸살 등 때문에 아파서 몸져누워 있거나 아예 동행 자체를 하지 못했으며, 큰 마음먹고 떠난 여행길은 천둥, 번개, 벼락, 강풍, 폭우 등으로 맑은 날씨 배경의 사진 하나 건지지 못했다.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수원 아주대 앞의 태화장은 매주 월요일이 정기 휴일인데 몇 번인가 그걸 깜빡하고 갔다가 허탕 친 경험이 있어서 월요일을 피해서 갔건만 주인의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은 일은 애교에 속한다.

남태평양 사이판에 다소 장기간 갈 일이 있었는데, 도착한 다음 날부터 몸이 으슬으슬 떨리더니 급기야는 온몸에 발진이 생겨 급거 귀국한 일쯤은 이제 잊은 지 오래다.


수년 전 월드컵이 열리던 날, 우리 가족은 동해 바다도 구경하고 속초 엑스포 공원에서 열린다는 거리 응원에 참석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미시령을 넘으면서 날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폭우와 강풍으로 인해 거리 응원전은 전격 취소되었다고 했다. 실망에 가득 찬 아이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의 와이프. 저녁을 먹으면서 호젓하게 TV를 보며 월드컵 응원을 하려는데, 가게 주인장이 자신들도 월드컵 경기를 봐야 하니 7시 반까지 나가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가족은 서둘러 밥을 먹고 나와 TV 볼 곳을 찾았으나, 대부분이 예약 손님만 받고 있었다. 겨우 겨우 찾아낸 허름한 호프집 구석. 우리 가족은 커다란 화분의 나뭇잎으로 반쯤 가려진 TV를 보며 월드컵 경기를 봐야 했고, 그것은 내 인생 최악의 월드컵 경기 시청이었다.


그 후, 지난 월드컵 경기 거리 응원에 실패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심산으로 설악산 인근 호텔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우연찮게 생긴 호텔 무료 숙박권이 생겨서인데, 회사 일로 인해 다소 출발이 늦어졌고,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우리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 내일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호텔 조식을 먹고,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산을 구경한 후, 맛있는 점심을 먹고 귀가하는 다소 단출한 일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짐을 꺼내기 위해 차를 향해 호텔 문을 여는데 바깥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강풍이 불어 거리엔 비닐봉지며 쓰레기들이 회오리 돌풍처럼 날아다녔다. 모른 척하고 가족들과 호텔 조식을 먹다가 혼자 몰래 밖으로 나와 권금성 케이블카 안내 전화로 통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오늘은 강풍으로 인하여 케이블카가 전면 중지되오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와이프는 진담처럼 들리는 농담으로 말했다. "앞으로 여행은 당신 혼자 가는 걸로 하자고"


그러고도 몇 번의 비슷한 일이 있고 나서 그간의 불운들은 잊고자 새로운 마음으로 떠난 제주도 캠핑 여행. 날씨도 좋았고, 일요일 오후 출발이라 관광객도 적고 나름 쾌적한 시작이었다. 드디어 제주공항. 렌터카를 빌리러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는 길.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렌터카를 받기도 전에 홀딱 젖고 말았다. 첫 코스로 잡은 화순 정낭 식당은 정기 휴일이었고, 신촌 덕인당 보리빵 집은 주인의 개인 사정으로 휴무였으며, 첫 캠핑 장소로 점찍었던 관음사 야영장은 물바다였다. 낙담한 채, 휴대폰 검색에 빠진 내게 다가온 초등학생 큰 아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빠, 괜찮아요. 다 추억이죠 뭐"


결국, 바리바리 싸간 캠핑 장비는 지퍼 한 번 열지 못한 채, 렌터카에 계속 실려있었고, 겨우겨우 잡은 허름한 여관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과 바퀴벌레의 향연으로 잠을 설쳐야 했으며, 다음날 아침, 숙소 앞 정자에서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을 때는 짐들이 바람에 날아가버려 라면을 먹다 말고 짐을 잡으러 다녀야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예정대로 캠핑을 하고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은 좀 편하게 자려고 잡은 표선 해비치호텔. 비가 쏟아지면서 아이들의 우비가 바람에 펄럭였고 쓰고 있던 모자는 날아가버렸다. 이젠 자포자기한 듯 와이프의 잔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래, 불운은 이제 그만.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제주도를 떠나는 날.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아있었다. 실내외가 연결된 수영장에서 아이들은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인 내가 와이프에게 다가갔는데, 그녀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저게 뭐야?"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한라산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저거? 한라산이지.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

나의 말에 와이프는 손으로 턱을 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몰라. 내가 제주도에 몇 번을 왔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맑은 날씨에 한라산을 보는 건 처음이야".

딸기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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