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슬픈 건 여전히 슬프다.

by 치기


1. 과거에 느낀 감정은 똑같이 반복될 수 없다.


2. 과거에 느꼈던 감정은 최초의 감정이다.


3. 훗날 비슷한 감정을 겪었다고 한들 당시와 미래에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상황과 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다를 것이다.


4. 소주제로 어떤 걸 잡을까 하다 불현듯 사랑이라는 감정에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꺼내고 싶어졌다.


5. 허나 그때의 감정을 세세히 기록하지도 못했거니와 그마저도 들춰내려 하는 것은 약간 번거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6.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는 것도 흥미로운데 과거의 기억을 붙들어 놓을 필요가 있나 싶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고 싶다가도 사랑을 위한 사랑이 아닌 소재를 위한 사랑을 하려던 충동적인 사고를 하는 스스로가 낯설어 그만두었다.


7. 사실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상황 밖에 있는 지금의 내가 상황 안에 있는 그때의 나와 감정이 똑같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안다.


8. 다만 기록을 파헤치는 동안 그때 느꼈던 감정을 되새김질하다 보면 같은 부분에서 상처받을까 무섭고, 그 시절 조각들이 붙으면서 아름다워진 형태에 다시 손에 닿고 싶어 할까 봐 겁먹어 숨었다.


9. 헛구역질이 올라와 게워내 버리거나 되려 생각보다 무감해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진 않을까 하는 합리화를 했다.


10. 보통 기록과 감정은 기쁠 때보다 슬프거나 고통스러웠을 때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기에 내면에 쌓여있던 부정을 글이라는 행위로 꺼내놓기만하고 다시 들춰보지 않았다.


11. 언제든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도 사실이다. 경험해 봤기에 겁이 더 많아진 걸 수도 있겠다.


12. 젠장, 다 필요 없고 아직 내가 아무렇지 않게 어질러진 기억을 다듬고 깎고 꾸밀 만큼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


13. 나는 굉장히 솔직한 편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글은 자기 방어에 쩔어있는 글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의적인 부분에서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감정을 이토록 가감 없이 털어놓는 것만큼은 정말 두 팔 두발 들어 박수를 치는 부분이다.


14. 어떤 형식으로든 종말을 겪은 작가들이 책으로 엮어 대중에게 닿을 수 있도록 남겼다는 것에 경의를 표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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