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헌 Sep 03.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25. 끝까지 한번 찾아보자!-(1)-35년 전 철이를 찾습니다, 2020


오후 느지막하게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전화..     


"여보세요?"     

"야~나 철인데 너 맞냐?"     

"누구...??"     

"나 철이야... 같이 공장 댕겼던..."     


아. 철이. 내 친구 철이.     

36년 만에 그 목소리는 여전했다.     


추석 때 만나기로 하고 끊었다.     


내가 자란 동네는     

갑자기 서울에서 공장들이 내려와     

공단 아닌 공단이 되었다.     

싼 노동력으로 대체되던 이른바 

자수, 봉제, 피혁, 금속, 제지 뭐 그런 회사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갈 형편이 안되어     

하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동구 밖 봉제회사를 들어갔다.     


가죽은 영국에서 들여오고     

골프장갑 완제품은 미국으로 수출하는     

전형적인 중진국형 임가공업체.       


사장은 그야말로 80년대 전형적인 

착취형 중소기업 사장 스타일.  

   

자기 고향 강원도에서 초, 중학교 

졸업한 친구들을 불러 올렸다.     

청소년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실컷 부려먹었다.        

우리는 가공무역을 하는 봉제공장이었는데 저 풋조이 골프장갑을 만들었다.  그때 그 마크를 여지껏 간직하고 있었다.

피혁 재단부, 봉제부, 포장부, 검사부 이렇게 나누어졌는데     

나는 기술이 필요 없는 포장부에 배속되었다.     

석유곤로에 손가락 형태의 다리미를 데워     

장갑에 집어넣어 형태를 잡는 일을 맡았다.     


그때 포장부 선임이 철이었다.     

착하고 성실하고 인기 탑이었던 친구.     


철이 여친은 검사부에서 제일로 이쁜 

동갑 친구 미자인가 은자인가 암튼 그랬고     

철이는 연애에서도 모범생?이었다.     


회사 이야기로 돌아가면,     

내 초임은 시급 600원이었다.


경리는 친척이었고

그녀는 매점으로 아이들 외상을 주었다.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같다.

 

중간간부 놈들은 차마 입으로 옮기지 못할 

저질 쓰레기들이 많았다.     


노동운동은 아직 소도시에는 먼 이야기였고     

관할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봉투라도 줬는지 사고 생겨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문제는 시골 청소년들이     

돈을 만지게 되니 

그야말로 방종의 시기를 맞은 것.     

그야말로 광란의 에브리데이였다.     


밥은 80년대 군대보다 더한     

혼식에 된장국, 소금 김치가 전부였다.     

아이들은 늘 나가서 군것질을 했고      

주말만 되면 시내에 나가 외상을 긁었다.     


뭐 고향집 시골에 많이 부치기도 했겠지.     


노랑 바지 빨간 바지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공순이, 공돌이들이라고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죽어라 벌어 나라 경제에 이바지하는데

왜 그렇게 비하의 대상이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기들 학비도 다 공순이 

누나들이 대 준 건데....   

  

아무튼 공장 안에는 

늘 욕설과 폭력이 난무했던 것 같다.      


월급날이면 동네 슈퍼, 시내 술집, 

아모레, 쥬단학 아줌마까지     

외상값 받으려고 수위실 앞에 진을 쳤고    

 

성관념은 갈수록 문란해지고     

기숙사는 늘 밤마다 주먹질에 

혼돈의 나날이었다.     


결국 추석이 되어 없는 살림에 

대학 좀 가보겠다고 나는 퇴사했다.     


어차피 철이는 내가
이 공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드물게 고등학교 나온 것도 있고..     


고향 떠나 멀리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갔다. 

어차피 고향 동네 공장이라     

가끔  방학 때나 휴가 때 나와서 보긴 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철이와 색시는 동거를 시작했는데 

예쁘게 잘 살고 있어 보였다.     


점차 나이를 먹고 내가 대도시로 떠나면서 

그렇게 연락이 끊어졌다.     


90년대 봉제공장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그 골프장갑 회사도 문을 닫았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했는데     

35년이 흘렀다.     


여전히 전화기 너머 친구는 

밝은 톤으로 웃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내 노동자 친구.     

중년의 해후가 설렌다.




후기, 친구를 만났다


추석 전야.  

오후 네시쯤 근처 편의점에서 만났다. 


세상에 동생 집에서 

고작 백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살고 있었다니...


명절 전날 아무리 극적인 해후라도 

집에 가봐야 서로 민폐다.  

가게 밖 의자에 앉아 캔맥주 두 개를 땄다.  



녀석은 생각보다 허연 내 머리에 놀라고 

난 많이  늙지 않은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친구도 나를 너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어릴 적 타향살이 공장 와서 

많이 의지했었다고. 

고맙다. 철아.  


서로 그간 살았던 이력서를 읊었다.  

알고 보니 그 골프장갑 회사는 8년 정도 다녔고 

철이는 줄 곧 금속회사에서 여러 군데 일했다고 했다.  

장성한 자녀를 둔 성실한 가장. 

역시 철이는 내 예상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세월이 무정하게도 

서로 기억의 오류들이 좀 있었다.  


철이:너 술 못 마셨잖아?

나:에이~동네라 그렇지, 시내 동창들 하곤 술 담배 많이 했다.  

나:너 술 많이 했잖아?

철이:무슨 소리야. 난 술 한잔 이상 원래 못했는데... 

껄껄껄. 퍼즐 맞추기에 서로 유쾌하게 웃었다. 

 

좀 있다 동갑내기 아내 00가 왔다.

 (미자 은자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봉제공장 동갑내기 셋이 추억에 빠졌다. 

 

특히 짠지와 보리밥 메뉴를 내놓고 소리치던 

식당 안경 아줌마를 셋이 기억해 냈다. 

사장이 밥 값을 그지같이 줬으니 거지 밥이었던 거지.  


"그 말 술 중간 간부는?"

"죽었어." 

"그 팀장 형은?"

"근처에서 마트 해." 

그리고 염소. 킹콩 친구들

(공장은 닉네임으로 많이 불렸다)

안부도 물었다. 

철이도 소식은 모른단다.  


서로 부모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이제 초로의 중년이 된 우리들은 

될 수 있는 한 자주 보자고 했다.  


"나도 이제 고향에 아무도 없고 

어릴 때 와서 그런가 여기가 고향 같아"란 

철이 말에 괜스레 시큰했다.  


곧 내 아버지 기일이 오니 그때도 보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 공장 사장 어찌 됐냐고 물었다. 

“진짜 완전 망했어. 거리에 나 앉을 정도로..” 

통쾌해야 되는데 왠지 슬펐다. 


그리고 우리들의 80년대가. 


작가의 이전글 여로(旅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