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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Sep 20.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36. 산 다람쥐, 1978~1999

     

대한민국이 대부분 그러하듯

내 고향은 산이 7할이다.


게다가 분지라서 눈도 많이 오고

겨울에는 아주 춥다.     

아이들은 늘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렸다.


그럼에도 무얼 심어도 잘 자라는

큰 무리 없이 사는 곳이었다.

가뭄도 홍수도 없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유명한 지역이 바로 우리 고향이고

진천이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죽어도 살아도 괜찮은 동네가 인근이니

환경이며 지형적으로도 유사하다.


다만 묫자리를 쓰면 배수가 잘된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어

아직도 용인은 수많은

공원묘지의 땅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들도

그러저러 무난히 살 수 있는 동네였다.    

 

부모님이 동네 초입 이쁜 집을 떠나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그래 봤자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슬레이트 새 집을 지은 것은

먼저 살던 집이 일 년에

한번 세를 내야 하는 남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삼면이 야산인 동네에서

언덕 위에 살다 보니

좋은 것도 많았다.


산골말 고개로 불리는 언덕 위에 집이 있던 터. 언덕은 예전보다 낮아졌고 솔밭도 사라졌다.


바로 옆에는 동네 아이들 놀이터인

뒷동산 잔디밭과 솔밭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야산이 길게 둘러싸고 있었다.     


더구나 산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봄에는 버찌를 따 먹고 칡을 캐러 다녔다.

여름에는 버섯을 땄으며,

가을에는 작지만 당도가 높은 산 밤, 개얌을 따고

겨울에는 땔감도 구하는

산은 정말로 없는 게 없는 곳이다.      


그리고 동네에서 가장 높다는

봉두산을 많이 다녔다.


집에서 소년 잰걸음으로 40분 정도 걸리는데

지금도 산행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 산은 친구 이상이다.  

   

봉두산에 오르면 시내와 경안천과

저 앞 동네까지 시원하게 감상이 가능하다.

개천 주변에 늘어선 공해공장 덕에

호연지기는 언감생심이겠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생일대 운명의 날이 오면

여기에 다시 와서

하나님 산신령님 도와달라고 하던 때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겨우내 땔감을 마련해야 해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평일 오후나 주말에는 나무를 해야 했다.

    

집집마다 경쟁적으로 하는 그 일은 간단치는 않았다.     

우선 남자애들은 갈퀴로 소나무 잎을 긁어모으면

여자 형제들이 부대에 그걸 발로 눌러 담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톱으로 소나무 참나무를 베어

장작 거리도 마련한다.     


어머니는 외양간 옆 창고에

땔감과 연탄이 가득 쌓이면

행복해하셨다.


집의 군불 담당이 큰아들 소관이라서

어차피 나는 창고관리 부책임자이기도 했다.

      

심심할 때 야산 참나무 가지 높은 곳을

산다람쥐 마냥 잽싸게 올라

넋 놓고 영동고속도로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수많은 공상을 하던 소년은,

지금 부산에서 가까운 산을 자주 오른다.


나무는 좀 더 키가 자랐을 텐데

사람들은 너무 빨리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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