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37. 대운동회, 1977
시골도 도시도 아닌
70년대 읍내 국민학교 운동회.
온 동네가 출동한다.
아침부터 청군 백군 나누어 응원하다 보면
아침부터 고학년 동네 형이 잡아 놓은
학교 구석자리에 동네 엄마들은
삼삼오오 모여 돗자리를 깐다.
어차피 이 학교는 동네 사람 모두가 동창인
읍내 유일의 학교라서 더더욱 모두의 축제이다.
당시 목청 껏 불렀던 응원가에
2,400 건아(健兒)라고 했으니
학교는 콩나물시루라서
운동장도 교정도 발 디딜 틈이 없다.
가을볕 따가운 햇살 아래 고생하며 연습한
곤봉, 체조 같은 매스게임이 끝난다.
저학년 친구들이
오재미로 박 터뜨리기를 하고 나면
아마도 점심시간이었을 터.
동리 엄마들은 찐 밤, 김밥.
과일 등등 진수성찬을 차려 놓는다.
정문 입구 천막에는 어른들이 학교 기성회에
십시일반 후원했다는
종이 이름표가 나붙고
정문 밖에는 이 세상 장사치들은 다 모였는지
코흘리개들 대상 대목 장이 섰다.
페스티벌이 따로 없다.
그날 아버지는 묵묵히 흰 우유를 하나 사주셨다.
소화가 안돼 그 뒤로도 우유는 못 먹었으되
그날 고소한 우유맛은 아직도 기억한다.
오후엔 내가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개인 달리기 시합이 있다.
늘 꼴찌를 도맡던 나는
모두가 공책 연필 부상품을 기대하며
이 악물고 달리는 레이스가 싫었다.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 스포츠는 젬병이었다.
수십 년 후 딸아이 운동회 때
나를 제쳤던 또래들이 배 나오고
숨이 차서 뒤로 처져서
덕분에 학부형 대회에서 2등을 했다.
달리기에서 처음 상을 탔다.
암튼 운동회가 끝나고
동네 친구들은 개선장군처럼
무리를 지어 집에 가는데,
그날은 눈여겨봤던 장난감이며
딱지 구슬도 살 수 있는 날이라서 기뻤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농사꾼 부모 손에 이끌려
콩밭을 매거나 논두렁에서 일을 해야 하는
시골 소년소녀들이 오래간만에 웃고 떠들던
10월의 신나는 축제였다.
우리를 살뜰하게 돌보던
여선생님은 칠팔십 대 어르신이 되었을 것이고
정문 앞 다리 위 번데기 아저씨는
살아계시면 백 살은 되셨을 것이다.
시간은 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