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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Oct 01.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43. 기자와 기레기 사이,

언론 경험 약사(略史), 1985-1998     


‘기레기’란 모욕적인 말이 유행하기 오래전부터

나는 기자의 꿈을 키우고 살았다.   

  

신문과 만화를 좋아했으므로

당연히 시사만화가를 꿈꿨지만

취재기자도 로망이었다.


특종을 하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멋진 열혈 기자.

얼마나 가슴이 뛰는

매력적인 직업인가.   

  

처음 신문을 접한 건 대학 때였다.

학보사 만화기자로 취재와 만화를 겸했다.


멀리 농촌 현장 취재도 해 보고

서울 노동운동 취재 갔다가

경찰 몰래 자료 들고 뛴 적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니 누구도

오라는 데가 없었고

실력도 일천했다.     


그때 제의가 들어온 곳이

고향 <00자치신보>였다.

중앙일간지 지국 사람들이

광고를 어찌 많이 해볼 요령으로

만든 신문인데,

트레이닝 하기엔 딱 좋아 들어갔다.


수습은 무슨,

모두 어설퍼서 내가 오히려 중견이었다.     

지역신문 출신 연로한 편집장,

교수 부인으로 기자를 해보고 싶었던 여성기자,

단출한 언론사가 꾸려졌다.    

 

그때 취재 제보 대부분이 골프장 폐해였다.

20개가 넘는 골프장 공화국에 신물이 나서,

나는 아직도 골프를 치지 않는다.

(친구들은 미쳤냐고 한다.

뭐 내 맘이죠.)     


결국, 신문사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고

안양의 <00신문>이란

주간 지역신문에 갔다.

     

사장은 나름 이 바닥

전설적인 편집기자 출신이었는데,

숙련공과 경영자가 다르듯

회사 재정은 위태위태했다.


자취를 하며, 기자 사명감에 불타며,

취재기자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때 겪은 웃긴 일화.


아파트 부녀회 비리 제보가 왔다.

관리사무실에 바로 갔다.


초짜 기자는

왜 그렇게 부끄럼이 많고

어리바리했는지.


취재를 마치고 그냥 나오면 될 것을

황급히 부리나케 나오다

유리벽면에 부딪혀 와장창 뒤로 나자빠졌다.


안경이 저 멀리 튀었다.

뒤에서 나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여직원 둘이 킥킥대고 웃었다.

쪽팔림은 순간이라지만

아직도 그 화끈거림이

잊혀지지 않는다.   

  

낯가림도 자꾸 이력이 되니

몇 년 뒤에는 경찰서장실에 쳐들어가서

맞다이도 뜨고 그랬는데,

누구라도 초년 시절은 실수 투성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열악한 지역신문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어느 날 <한겨레신문>에

괜찮은 지역신문 기자 공채 공고가 떴다.  

   

우리 때라고 해서

취업이 잘되고 그러지 않았다.     

경쟁률이 7대 1이 넘은 것 같은데

용케 부천의 진보적 신문

<00시민신문>에 들어갔다.  

   

다소 체계적이고 사람도 많은

중견 지역신문이었다.

처음으로 수습 트레이닝도 받았다.   

  

나름 기자 관련 책을 많이 읽어봐서

특종에 목메고

사회 정의 어쩌고 기자정신도 충만했다.  

 

부천을 종횡무진하며

동료 기자들과 밤새 통음하며

아름다운 청춘의 한때를 보냈다.  

   

세상에 날카롭게 대항하던 청년 기자 시절, 1997년

   

리더가 떠나자 중간관리자들의

오버로, 내부 갈등으로,

소중한 이곳도  위기가 찾아왔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곳에서

오히려 우리 젊은 기자들을 탄압했다.

나는 '해고'라는 된서리를 맞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 취재기자는 그만하고

본격적인 시사만화가가 하고 싶었다.  

   

수원 시사만화하는

선배 사무실에 찾아갔다.

한 1년만 작업실 쓰게 해 달라고.     

그래서 작업실에서 백수 겸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우리나라 신문 잡지가 없을 정도였다.

독자만화에 늘 내 이름이 실렸다.     


도하 국내 일간지 신문과 잡지에

내 이름이 실리니 기분은 좋은데,

(트레이닝 치고는 완벽했다)

고작 3만 원 고료는 용돈벌이도 안됐다.

가난한 어머니에게 용돈 받고 다녔다.

백수의 서러움과 자기 연민이 많은 시기였다.

잡초 같은 인생에 익숙했지만

그때는 30대 초반이니

나름 번민이 많았나 보다.     

     

이래저래 운이 좋아 지역 일간지

<00일보>란 곳에 들어갔다.

뭔가 제도권 언론에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규모도 크고 체계적이었으나

지역 일간지 비리와

고질적인 시스템은 어쩌지 못하는 신문이었다.


뭔가 시궁창에서 꽃을 피우는 심정.     

그래도 화백으로

열심히 그렸고

경기도 내에서는

자타공인 탑 시사만화가였으나

내 꿈은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또 해고당하고

일본 가고

그렇게 내 언론 생활이 끝났다.

     

기자 하면서

우리나라 언론이 바뀌면

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요즘은 환경이 더 나빠진 것 같다.

    

그래도 어느새 꼰대가 된 내가

청춘 기자들에게 할 말은 이것 뿐...

"그래도 파이팅!!!"

더러운 연못에도 연꽃은 피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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