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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Oct 05.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47. 학교 앞 다리, 1972~1978


학교 앞 낮고 짧은 다리에는 

몇 가지 추억이 있다.


이름은 석성교. 새로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1) 다리 밑에 거지

무섭다던 거지는 정말로

다리 아래 가마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웬만하면

다리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2000년대 초 일본 교토 다리 밑에

거지가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30년 만에 일본에서 다리 밑

빈민, 혹은 노숙자를 보다니.


본인 소장 옛날 물건들


2) 겨울 동화

1학년 코흘리개들은 아장아장 걷는다.

화장실 가는 길은 

꽁꽁 얼어서 미끄러웠다.


동기가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미끄러져 가로로 된 소변통에 빠졌다. 

오줌 범벅이 되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일러

셋이 같이 다리 밑에 갔다.


그 엄동설한 추위에도

여선생님은 개천 물로

아이를 씻겼다.


곱던 20대의 그 선생님은

지금쯤 70대 중반쯤 되셨을 터.


고맙습니다, 선생님.


3) 번데기 아저씨

통학 길 다리 위에는 항상

번데기 장수가 있었다.


아저씨는 번데기 통에서

한 국자씩 떠서

신문지 삼각형 말이에 담아 주었다.

아침 단백질 섭취에는 그만이었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 전국 학교 앞

번데기 불량식품이라고 된서리가 내렸다.


몇 년 후 다시 번데기 아저씨가 왔지만

예전처럼 그 호황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4) 달고나

다리 건너면 바로 문방구 앞

띠기(떼기)가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백발백중 실패였다.

요령 좋은 녀석들은 

50% 성공률이었다.


5) 신문과 만화

반대로 다시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면

정문 앞에서 소년조선, 소년동아 같은

신문을 팔았다.

만화에 미친 나는 

버린 신문을 모두 주워

통독했다.


6) 수여선과 어머니

그때는 여주-이천-용인-수원 가는

수여선 기차가 있었다.

학교 다리 앞이 정거장이었다.


수원-여주로 쌀과 숯을 공출하려는

일제가 만든 노선으로 보인다.


놔뒀으면 지금쯤 

훌륭한 전철이 되었을 텐데

수요가 적어 철로가 뜯겼다.

 이 철교를 통해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용인시민신문


이게 수인선 협궤열차와 연결되어

어머니는 가을이면 

소래포구까지 가서 새우젓을 

한통 가득 사 오셨다.


겨우내 김장김치를 위한 준비였는데

동네 아낙들이 모두 한꺼번에 단체로 갔다.


그날만은 산골에서 꽃게며

각종 생선도 구경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새우젓을 되팔고 

또 다녀오곤 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간만에 여행인 듯하여

생전에 즐거웠노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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