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47. 학교 앞 다리, 1972~1978
학교 앞 낮고 짧은 다리에는
몇 가지 추억이 있다.
1) 다리 밑에 거지
무섭다던 거지는 정말로
다리 아래 가마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웬만하면
다리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2000년대 초 일본 교토 다리 밑에
거지가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30년 만에 일본에서 다리 밑
빈민, 혹은 노숙자를 보다니.
2) 겨울 동화
1학년 코흘리개들은 아장아장 걷는다.
화장실 가는 길은
꽁꽁 얼어서 미끄러웠다.
동기가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미끄러져 가로로 된 소변통에 빠졌다.
오줌 범벅이 되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일러
셋이 같이 다리 밑에 갔다.
그 엄동설한 추위에도
여선생님은 개천 물로
아이를 씻겼다.
곱던 20대의 그 선생님은
지금쯤 70대 중반쯤 되셨을 터.
고맙습니다, 선생님.
3) 번데기 아저씨
통학 길 다리 위에는 항상
번데기 장수가 있었다.
아저씨는 번데기 통에서
한 국자씩 떠서
신문지 삼각형 말이에 담아 주었다.
아침 단백질 섭취에는 그만이었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 전국 학교 앞
번데기 불량식품이라고 된서리가 내렸다.
몇 년 후 다시 번데기 아저씨가 왔지만
예전처럼 그 호황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4) 달고나
다리 건너면 바로 문방구 앞
띠기(떼기)가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백발백중 실패였다.
요령 좋은 녀석들은
50% 성공률이었다.
5) 신문과 만화
반대로 다시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면
정문 앞에서 소년조선, 소년동아 같은
신문을 팔았다.
만화에 미친 나는
버린 신문을 모두 주워
통독했다.
6) 수여선과 어머니
그때는 여주-이천-용인-수원 가는
수여선 기차가 있었다.
학교 다리 앞이 정거장이었다.
수원-여주로 쌀과 숯을 공출하려는
일제가 만든 노선으로 보인다.
놔뒀으면 지금쯤
훌륭한 전철이 되었을 텐데
수요가 적어 철로가 뜯겼다.
이게 수인선 협궤열차와 연결되어
어머니는 가을이면
소래포구까지 가서 새우젓을
한통 가득 사 오셨다.
겨우내 김장김치를 위한 준비였는데
동네 아낙들이 모두 한꺼번에 단체로 갔다.
그날만은 산골에서 꽃게며
각종 생선도 구경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새우젓을 되팔고
또 다녀오곤 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간만에 여행인 듯하여
생전에 즐거웠노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