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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Oct 07.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49. 4H 혹은 새마을 청소년회, 1979


새마을 운동에 청소년을 

끌어들인 것은 4H 조직이었다.


지덕노체를 강조하며

새마을운동 서브 조직으로 

정부가 독려한 시스템이다.


어차피 농촌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판에

노동을 어려서부터 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런 조직은 한마디로 껌보다 쉬웠다.


낫질, 삽질 동네 봉사야

평소 하던 노동의 일부니까.


전 국민 총동원이라는

미명 하에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초등학생은 새마을 청소년회라는 이름으로

정부에 봉사했다.


매 해 잔디 씨와 코스모스 씨를 

편지봉투에 담아 가야 했다.

(가을 땡볕에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데,

봉투 하나를 다 담아 가려면

며칠을 고생해야 했다.)


잔디 뗏장도 떠 가고 그랬다.


아마도 미군부대 골프장과 

방방곡곡 동네 초입 국도 주변 

코스모스는 우리 고사리들 손 덕일 것이다.


어르신들도 늘 마을 입구에서 단체 활동을 하곤 했다.
마을 입구는 이제 공장 빌라 마트로 번잡해졌다. 

단합, 상부상조가 생명인

4H에 가입하면

동네 형들이 리드를 한다.


제일 먼저 형들이 만든 것은

야산에 샌드백과 쿠션이었다.


당시 70년대는 태권도 합기도 절권도

붐이라서 형들은 유단자들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며

새벽에 우리들을 불러 

낙법 등을 가르쳤다.

부모들도 이런 것은 백번 찬성했다.


하루는 동네 별로 참여하는

군(郡) 단위 4H 경진대회를 갔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어쩌고 하는 어쩌면 1박 2일 캠핑 같은데,

교육은 짜증 났지만

먹을 것도 기념품도 줘서 나쁘지만은 않았다.


꼰대들 지도자들은

권위적이라서

동네 형 하나가

뭘 좀 따지니까 싸가지 없다면서

매섭게 싸다구를 날린 기억도 선명하다.


아침이면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새벽종이 울렸네~"같은 

새마을운동 시그니처 노래가

동네 확성기에서 잠을 확 깨운다.


하필 확성기가 우리 집 언덕 위라서

아침 달콤한 잠은 아예 없었다.


저녁엔 대통령 각하가 친히 만든

'나의 조국'이란 노래를 암송하며

하굣길에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하는

6.25 노래, 

혹은 

향토 예비군가를 들으며

아이들의 70년대도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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