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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Oct 09.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52. 나도 가해자였다, 1988


군대 꿈을 50 초반까지 꾸었다.

대개의 한국 남자처럼

내게도 군대는

지독한 악몽이었다.


24살 좀 늦게 간 군대는

나이가 걸림돌이 되었다.


선임하사는 나보다 어려서

더 나를 갈구었고

선임들 비아냥에

자존심이 더 상했다.


뭔가 20살 전후 뭘 모를 때 오는

친구들이 적응이 빨랐다.


80년대 군대는

아침저녁으로 매타작이었다.

전방에서 소지하는

총과 수류탄으로 사고 치거나

북으로 도망가는 사고병들이

그래서 한때는 이해도 됐다.


야삽 몽둥이 등 도구가 금지되어

주로 주먹 군화로

멍이 잘 안 드는 목. 정강이.

허벅지 등을 골라 때렸다.


닥치는대로 성질을 못 이겨 패는

고참이 가장 무섭다.

그들은 세숫대야도 연탄재도

보이는 대로 던진다.


5분 만에 두들겨 패고

화가 풀리는 고참도 있고

때리지 않고 엄동설한에

팬티만 입혀 놓고 잔소리하던

선임들도 있었다.


내 동기는 적응 힘들어하던

어린 친구였는데, 고문관으로 찍혀

맞다가 맞다가 사고 칠 수 있다며

후방으로 전출 보냈다.


대학 생활과 연애를 하고 오니

더 적응이 더뎠는가

나도 이래저래 실수가 많아

많이 맞았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

나 또한 괴물이 되어갔다.


더구나 자라오면서 부모 학교에서

거의 맞지 않고 자란 범생이는

맞을수록 사디즘 마조히즘

그런 게 생겼는가

안 맞으면 잠도 안 오고 그랬다.


공포의 상병 식기 당번은

누구나 맡고 싶은 군기반장 겸

먹거리 조달 짬이다.


나도 식기 당번이 되자

무서운 선임 역할을 했다.


당연히 하는 거라고,

체계라서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자위했지만

안 때리는 고참도 있었다.

그러니 변명치고는 궁색하다.



전방 철책근무는 밤새 근무서고 나오면 두들겨 맞았다. 이미지 출처:뉴스1, https://www.news1.kr/amp/articles/?848337


내가 우리들의 일상화된

폭력을 멈춘 건

야외훈련 때였다.


병장 1호봉 때 받은

후견인 이등병이

실수해서 때렸는데,

좀 문제가 생겼다.


순간 아, 인생 끝났구나 생각했다.

다행히 맞은 친구가

아무 일없다는 듯 일어서고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꼴뚜기, 망둥이 노릇을 그만두었다.

내 인생 지우고 싶은 흑역사이다.


영화 DP를 봤다.

군대 드라마 영화 예능은

쳐다도 안 보는데,

이 영화를 보며 마음속으로 울고

용서를 빌었다.


에필로그.

2015년 26년 만에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고

믿음으로 지켜 준

존경하던 고참 이상병을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이등병 시절 내 후견인으로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나를 정말 정성으로 감싸주고

적응하도록 도왔다.


역시 그 성정대로

가난하지만 착한

목사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랑을 받았으되

나는 후배들을 때렸으니

죽고나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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