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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Oct 10.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53. 보도본부 24,1983


초중고 반장은 대개

공부 잘하는 애를 시킨다.

공부와 리더십은

네버 1%도 상관없는데

선생들은 으레 그렇게 했다.

말 잘 들으니 편했겠지.


고3이 되니

아무도 반장을 하려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초등학교 때부터 노는데 일가견 있던

애늙은이 일진 친구가

번쩍 손을 들었다.

모두가 동의했다.


신선한 일진 반장 체제가 시작되었다.

공부 더럽게 못해 언감생심 반장자리

꿈도 꾸지 못했던

우리 친구는 의욕이 넘쳤다.

더구나 전교 일진 반장 학급이라서

누구도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어느 날 신임 반장이

나 보고 한마디 했다.

“너 미화부장해라.”

“왜?”

“만화 잘 그리잖아.”


대학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보려는

속마음을 어찌 알고. 짜식!


시사만화가 내 꿈이니

데뷔하는 마음으로

나는 당시 KBS 뉴스

보도본부 24를 패러디해

보도본부 32(3학년 2반)를

만들었다.


매주 기다란 모조지에

이번 주 반의 뉴스거리를

익살스럽게 그려

뒤편 게시판에 붙였다.


지난주 영식이 집에는

개가 태어났다,

태호가 이번 중간고사

수학 점수가 놀랐단다 등등.


생애 최초의 연재만화였다.

모두가 행복한

일진 반장과 미화부장의 콜라보는

그렇게 일 년을 꽉 채웠다.


선생은 그걸 보고

나중에 대학 가면

학보사 만화 기자 해보라고 권유했다.

대학을 가야 말이지요.


몇 년 후 거짓말처럼

나는 대학을 가서

만화 기자가 되었고

세월은 또 흘러 10년 뒤.


시장 안 고추장 돼지갈빗집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 엄마 가게였다.


녀석도 회상하며

그때가 아주 행복했다며

내 만화를 모두 모았는데

그만 이사하느라 잃어버렸다고 했다.


고맙다. 친구야.

니 덕분에 수습 시사만화가

충분히  연습해서

대학 가자마자 인기만점이었음.


한국인은 자기 인정 욕구가

강하다고 하는데

능력을 캐치해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

리더의 중요 자질이다.

리더는 공부랑 상관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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