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56. 이모의 일생, 2001
일본 유학시절 야끼니꾸 집에서만
알바를 했다.
어차피 스시집 편의점에서는
나 같은 늙다리는 쓰지 않는다.
대개 한국인 서빙, 주방 이모들을
많이 만났다.
외국에까지 일하러 나온 사연은
구구절절 필설로 다 못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왔겠냐"는 논리이다.
마지막 교토의 고급 고깃집 서빙 이모는
이쁘고 조용한 이모였는데,
나랑 열 살 차이 났다.
아이들 핏덩이를 두고 이혼 후
타국에서 20여 년간 온갖 고생으로
자식 뒷바라지에 인생을 건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가
처자식 두고 온 나, 미스터 윤을
끔찍이 챙겼다.
퇴근길에 고기며 김치를
싸 주기도 하고
상호 간 인생 상담도 많이 했다.
우리는 환상의 서빙 복식조였다.
단체손님 처리도 손쉽게 해냈다.
재일교포 사장 할매는
한국인들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아
다소 신경질적이었고,
주방이모는 이모대로 스트레스가 많아
우리 서빙, 배달 조는 동병상련도 있었다.
단골손님이 많아 나름 그 일대
최고의 지배인 격이었는데,
오랫동안 자기만의 가게를
꿈꾸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철없는 결혼 실패 후
일본에서 식당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하루에 알바 3개까지 뛰며 키운 자식들은
대한해협 너머 부산에서 잘 자라
판사, 복지사가 되었다.
이모의 인생 스토리는 일단 성공작이다.
더구나 내가 유학을 끝낼 즈음,
드디어 교토 그 비싼 땅에 자기만의 가게도
갖게 되었다.
몇 년 후 찾은 가게.
이모는 성공해 돌아와 축하하자며
우리가 평소에 늘 지나치던 옆집
고급 초밥집을 가기도 하고
다음날 절과 관광지를 다녔다.
앞만 보고 달리던 우리가 못 느꼈던
교토는 아름다웠다.
오로지 모성애로 버틴
간결한 삶은 존경스럽고
요리와 식당 마케팅에 관한 노하우와
열정은 배울게 많았다.
얼마 전 들으니 코로나 탓인가
가게를 접고
남의 가게 오픈 도와준다고 들었다.
본인이 1급 요리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교토에서 건강하시기를.
걱정하던 자식들 이제 그만 놓아주시고
작고 예쁘고 여유로운 식당 하나 하시길.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선배 세대의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