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짱을 끼고 < Life 레시피 >
운동을 하면서 TV를 보다가 우연히 예전의 영화 <투캅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영화 <투캅스>하면 안 좋은, 아니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 떠오른다.
결혼 전에 남편 말고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사돈어른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름도 나이도 어디서 살았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다만 그 남자의 전체적인 실루엣과 얼굴 이미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여하튼 다른 것은 고사하고 일단은 내가 너무 싫어하는 타입의 남자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정말 그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싫었다. 내 눈이 그때나 지금이나 하도 요사스러운 탓일 것이다.
오죽하면 나의 요사스러운 오감이 둔감해지도록 기도까지 할까! ㅋ.
사돈어른이 소개해 주었으니 예의를 다해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총 3번인가… 만났는데 마음속으로는 오로지 이 관계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열열한 갈망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한 번으로 끝내고 싶었는데 사돈어른의 간곡한 만류에 어쩔 수 없이 3번이라는 기이~~~인 내게는 너무도 긴 여정을 이어갔다.
3번째 만나는 날 그 남자는 내게 영화 <투캅스>를 보자고 제안했다.
‘엄마~~~아~~~, 어쩌지……’
당황스러워할 틈도 없이 남자가 말했다.
“투캅스가 그렇게 재미있대요! 같이 봐요!”
“아… 네~~~~…”
남자의 느닷없는 요청에 딱 거절할 순간도 그만 놓치고 어느덧 극장 앞에 도착했다.
어떤 극장이었는지, 어떻게 갔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ㅋ.
마치 도살장을 끌려가는 소처럼, 내가 소가 아니니 소의 심정을 정확하게 알 리는 없지만 티켓 두 장을 내 보이며 씩 웃는 그 남자의 표정이 싫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했다.
참, 나도 그렇다.
왜 극장까지 끌려갔으며(글쎄... 끌려갔다고 하기에는 내 발로 갔으니...), 왜 그 어두컴컴한 극장 안까지 들어가 자리에 앉았는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혹시 바보?
사돈어른에 대한 지나친 예의?
거절하지 못하는 내 유약한 심성 때문?
지금 정도만 돼도 딱 잘라 거절했을 텐데 ㅠㅠㅠ.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 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남자들의 흑심에 대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곳에 가면 은근슬쩍 손을 잡으려는 흑심 ㅋ.
내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겉으로는 표현 안 하겠지만 속으론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 텐데… 이건 상황이 전혀 달랐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싫은데ㅠㅠㅠ… 거기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은근슬쩍 내 손이라도 잡으려고 한다면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ㅠㅠㅠ.
으~~~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다.
‘그래, 조심해야 해!’라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그 남자가 내 손을 잡지 못하도록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냥 동물적인 반사 작용으로 꽉, 아주 꽉 팔짱을 꼈다. 어떤 열쇠로도 풀 수 없을 만큼 아주 단단하고 견고한 팔짱을 꽉 ㅎ. 지금 생각하면 웃길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만, 그때 나는 정말 심각했다. 그 남자와 같은 공간 안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정도였으니까 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정면만 바라보았다. 영화의 내용도 그 어떤 것도 전혀 내 눈에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냥 누군가 내 팔짱이라도 억지로 푸는 날에는 가만 안 놔두겠어라는 굳은 결의에 찼을 뿐… 스크린만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가끔 그 남자는 웃기는 장면이 나오면 웃으면서 나를 슬쩍 쳐다보며 호응해 주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길을 가련다!’, ‘너는 웃어라! 나는 너 안 보련다!’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오로지 스크린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투캅스>가 웃기는 영화, 안성기와 박중훈이 주인공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보았는지, 영화를 보고 난 뒤 식사를 같이 했는지, 해가 있었는지, 해가 없었는지 정말 도무지 아무 생각이 안 난다 ㅋ.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웠는데, 온몸이 욱신욱신 쑤셔댔다.
‘왜 그러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긴장 상태에서 팔짱을 끼고 영화를 보았으니 온몸이 몸살을 앓는 것 같았다.
씁쓸했다.
‘뭐 하는 짓인지! 참!’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나도 나지만 그 남자는 무슨 죄로 웃어주지도 않는 여자와 그 시간들을 보냈을까?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 때문에 또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다음 날 나는 사돈어른께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남자를 만난다면 과연 지금도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젊은 시절, 아니 철없는 시절의 나는 그 남자의 외면이 너무나 커 보였기 때문에 그 남자의 내면은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나와 같이 사는 남편이 외모적으로 뛰어나지도 않은데…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인연이 아니었겠지? 하고 합리화할 수밖에 ㅋ.
오늘도 나는 나의 이 요사스러운 눈이 덜 요사스러울 수 있도록 기도 중이다. ㅎㅎㅎ.
* 표지 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