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 2014년 8월 14일
너무 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래서 첫 목표였다.
하지만 이미 이 산의 3/4이 중국의 것이다.
고작 이걸 보려 여기까지 왔느냐? 손 한 번 넣어 보지 못하고...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갈라 심장을 담가 보고 싶다. 16시간 배, 19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온 먼길인데 바라만 보고 가야 하니 안타깝다.
서파, 북파, 남파, 동파.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4 곳 중에 3 곳이 중국 땅이다. 백하는 그중 서파, 북파를 가는 버스가 왕래하는 곳이다.
일 년 중 7월, 8월 두 달 동안에만 천지를 볼 수 있는 좋은 날씨가 많아 중국인 관광객으로 가득하다. 청나라는 우리와 유사한 민족인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에 이 곳에서도 장백산(백두산)은 영산이다. 유목민족에게 큰 산은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영험한 산이다.
청나라는 만주에서 시작했고 태조 누르하치가 백두산 일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수련했기 때문에 1628년 봉금령을 내려 이곳을 성역화했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이주를 금지한 것이다. 조선인이 이 곳에 자리 잡은 것은 1875년 봉금령이 해제된 이후의 일이다.
수확물의 2/3를 소작료로 가져가는 중국인 지주 아래의 소작농 생활이었지만 이 추운 북간도에 그들이 자리를 잡았고 기나긴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곳이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영광을 만들게 한 곳이지만 그 대가로 일제가 일으킨 간도 참변으로 3,600여 명의 주민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장백산'은 중국이 따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원래 부르던 이름 중 하나이다. 화산 폭발로 분출된 회백색 부석이 두껍게 쌓이고 눈이 쌓여 더욱 하얀 산이다. 백두산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대대로 산이 희다고 불함산, 단단대령, 백산,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영응산, 대백산, 장백산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신라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흰색'만 남고 '크다'는 사라져 버린 이름이다. 어쩌면 고구려의 영산이었던 산을 낮춰 부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이 산의 이름도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듯하다. 남들에 의해 갈려진 나라에 사는 지금은 아닐 테고 훗날의 일이겠지만 그 날이 속히 오길 기다린다.
천지를 보는 감동은 한없이 가슴 뛰게 하는 벅참이기도 하지만 간도 땅의 슬픈 역사와 가지 못하는 곳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안 가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언젠가 동파에 오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