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라와요 2015년 1월 27일
100조 달러 지폐가 넘쳐 나던 곳
독재자와 서방국가들 사이에서 주민들은 삶을 견디고 있다.
'있을 것 같지 않은 진짜(improbable genuine)'를 뜻하는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이 있다. 노벨상의 패러디 격으로 현실적 활용 가능 여부에 관계없이 발상 전환을 돕는 이색적인 연구에 수상한다. 이 상의 상금은 무려 10조 달러이다. 하지만 미국 달러가 아닌 짐바브웨 달러이다. 빵 하나도 사지 못하는 금액이다.
짐바브웨는 전 세계 국가 중 최장기 독재인 무가베 정권의 집권이 계속되는 나라이다. 식민지 시절 독립 무장 투쟁을 벌여 국민의 영웅이 되었지만 독립 후에는 장기 독재를 통해 주민들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았다.
고생은 어느 곳에서나 가난한 주민들의 몫이다. 700만 명의 주민은 국제적인 식량 원조에 연명하고 94%의 국민은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일부는 남아공으로 피난을 가서 난민으로 살다가 남아공의 경제 악화로 남아공 사람에게도 린치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무가베는 그 경제 문제가 오직 서구의 경제 봉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 제도를 바꾸고 부정을 반복하며 호화로운 그의 생일상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변명이란 걸 알 수 있다.
경제 봉쇄의 원인이 되었던 외국인의 재산 몰수는 어쩌면 필요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독립(1980년) 직후 단 1%의 백인이 90%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구조는 신생 독립 국가에게는 개혁의 필요성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몰수가 서구의 경제 봉쇄를 가져왔고 경제 기반이 농산물의 생산·수출뿐인 국가는 몰락의 길만 남아 있었다.
자신의 집권을 끝낼 의지가 없는 독재자와 그 독재자가 집권하는 한 도와줄 수 없다는 서방 국가들의 사이에서 이 곳의 주민들만이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무가베가 계속 집권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 곳의 주민들이 서구를 구원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가베도 서방국가도 그들에게는 구원자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재'이다. 자본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모두 민주주의를 외친다. 중요한 것은 경제 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시작은 먹고사는 일이다. 주민들은 그냥 삶을 견디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무가베가 이제 92세의 노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와 견준다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문명을 갖은 나라이고 농경 부족인 슈나족과 호전적인 줄루족이 큰 다툼 없이 평화를 유지하는 나라이다. 영어가 공용어이고 기독교를 종교로 하는 까닭에 이민도 늘어나고 있다. 멀지 않은 시기에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다.
10조 달러, 30조 달러 지폐가 보인다. 가치 보관과 교환의 기능을 하는 화폐가 아니라 기념품으로 팔리는 것이다. 게다가 10조, 30조짜리는 가치가 없고 100조 달러는 되어야 기념품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한다. 짐바브웨는 경제 봉쇄 이후 최악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고 자국의 화폐를 포기했다.
인플레이션에 마구 찍어냈던 고액권은 관광 기념품 신세이고 무가베가 가장 싫어하는 나라인 미국의 달러를 화폐로 사용하고 있다. 지폐는 미국 달러, 동전은 이웃 국가인 남아공의 란드를 사용한다. 란드 대신 동전을 현지 화폐로 새로 만들었다는 안내문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것도 하나의 자존심의 표현일까 궁금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을 보고 싶어 '불라와요'에 멈춰 섰지만 다시 이 곳에서 경로를 벗어나 장시간 이동을 해야 한다는 말에 포기한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관계로 차량을 렌트하고 1박 2일을 투자해야 다녀올 수 있다. 고생이야 뭐 할 만큼 한 일행들이지만 비용이 문제이다. 짐바브웨가 제네바 협약 가입국이 아니어서 차량뿐 아니라 드라이버까지 고용해야 한다. (한국의 국내 면허를 인정하지만 별도 신청을 하고 현지 면허를 받아야 한다.)
수도인 하라레가 아닌 제2 도시라는 불라와요와 빅폴타운 모습으로 짐바브웨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