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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려놓기 Jun 28. 2016

체 게바라를 기리며

산타 클라라 2015년 5월 18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체 게바라의 도시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곳을 떠나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체 게바라의 도시이다. 체 게바라가 이 곳에 입성하며 끝없는 게릴라전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결국 쿠바 혁명이 성공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지인 카스트로는 볼리비아의 밀림에 버려진 체와 게릴라 동지들의 시신을 찾아 바로 이곳에 안치했다.


쿠바 의술이 세계 최고라고 하지만 의사의 월급은 청소부와 같다. 쿠바에서 의사는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다. 쿠바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대학까지 무상교육이다. 그 무상교육에 의대도 물론 포함된다. 


하지만 정말 쿠바에서 의사가 봉사해야 하는 직업인 이유는 쿠바 의사들의 롤모델이 바로 체 게바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쿠바는 베네수엘라에 5천 명의 의사를 파견한 대가로 석유를 저가로 들여와 미국의 경제 봉쇄에도 나름 건실하게 버텨내고 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에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을 하던 중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과 고통을 체험하게 되자, 이들을 돕기로 결심하고 1956년 쿠바 반정부 혁명군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사였지만 곧 전투에 참가하였고, 그는 쿠바 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혁명 후 쿠바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체 게바라는 국립 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쿠바의 권력 핵심이 된다. 하지만 쿠바 혁명 6년 후, 그는 집권자 카스트로의 다음의 지위임에도 콩고, 볼리비아 등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를 떠난다. 그리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정부군에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20세기의 세례자 요한으로도 평가되는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는 1965년 쿠바를 떠나면서 그의 혁명 동지였던 수상 피델 카스트로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자신의 유서와도 같은 이 편지에 '비록 나의 최후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할 지라도 나는 마지막 순간에 쿠바 민중과 (특별히) 동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남겼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을 '승리를 향해 영원히 전진!  혁명이 아니면 죽음을! 내 혁명의 열기로 그대를 끌어안으며'라고 썼다.


쿠바는 아직 체와 함께 한다. 쿠바의 모든 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혁명을 위해 영원히 살기로 결심한 체 게바라에게 쿠바의 인기 가수 카를로스 푸에블라는 노래를 만들어 헌정했다. ‘아스타 시엠프레 코만단테’(Hasta siempre Commandante), ‘사령관이여 영원하라’라는 곡이다. 이 노래는 쿠바 민중이 그의 마지막 편지에 대답하는 노래가 되었고 이제는 남미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 



세계 각국의 가수들이 다시 불러 버전만 200개가 넘는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버전이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쿠바적인 목소리로 불리어진 노래다.


산타 클라라 초입이다.
체 게바라의 마지막 편지를 새겨 놓았다.
동상과 기념물 아래 기념관과 체 게바라와 게릴라 동지들의 무덤이 있다.



휴대폰 분실로 쿠바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 일행들의 사진을 넘겨받아 첨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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