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묵 참페이 2015년 5월 29일
산골 깊숙이 들어오니 이 곳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와 가깝다.
만나는 사람이 좋으면 그곳이 좋은 곳이 된다.
마야어로 ‘성스러운 물’이란 뜻의 세묵 참페이(Semuc Champey)다. 깊은 밀림 속에 위치한 세묵 참페이로 들어서려면 랑킨이라는 시골마을에서 다시 4륜 구동 트럭의 짐칸으로 옮겨 타고 좁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40여 분을 더 달려야 한다.
산골 깊숙이 들어오니 이 곳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와 가깝다. 더운 햇볕 때문에 우리보다 조금 더 검은 피부지만 아이들의 웃는 모습은 그냥 한국의 아이들 모습이다. 1만 5천 년 전 시베리아에서 알래스카로 건너간 그 들의 조상은 아마도 우리와 더 비슷했을 거다. 코르테스의 학살을 당하고 또 오랜 식민 시대를 격으면서도 모습은 물론 언어까지 그대로 이어간다니 대견하다.
오늘날 중앙 아메리카 인구의 다수는 메스티소(mestizo)다. 스페인계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종이다. 정복자 스페인도, 피정복자 원주민도 그들의 조상이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간했다.'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마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700만 명이 남아 있다. 멕시코를 비롯해서 벨리즈, 온두라스까지 흩어져 있는 마야인들이지만 이 곳 과테말라는 원주민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모든 부과 권력은 유럽계 이주민과 메스티소들의 것이다. 36년간의 내전을 치루기도 했지만, 원주민 세력은 패배했다.
1947년에 과테말라 공화국이 선포되고 나서 식민 시대에 겪었던 빈부격차와 원주민 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인디오들은 과격한 대중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우익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원주민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원주민들의 일부가 무기를 들고 대항하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군부는 게릴라가 아닌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1996년 내전이 종결되기 전까지 과테말라 내에서 원주민 14만 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과테말라 육군의 군령은 마야 마을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마을 주민을 한 곳에 모은 후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렀다. 그렇게 수백, 수천의 마야 마을이 사라졌다.
오랜 식민 시대로 더 이상 마야의 신을 믿는 원주민은 없다. 카톡릭을, 아니면 개신교를 믿는 신도들이었지만 마야 원주민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그들은 죽어갔던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오백 년 전까지 줄곧 이 땅의 주인이었고, 동시대의 어느 곳 못지않은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지금은 사회의 최하층민이다.
우리와 너무 가까운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하지만 그들의 지난 삶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다.
세묵 참페이는 라오스의 방비엥과 비슷한 곳이다. 강물 빛이 비슷하고 비슷한 다리가 있고 동굴 탐험과 튜빙을 즐기는 곳이다. 방비엥이 마음먹으면 2~3주를 죽칠 수 있는 곳이라면 이 곳은 3일 이상은 어려울 것 같지만 느낌이 비슷하고 주민들의 모습까지 비슷하다.
밤 10시가 넘어 숙소의 전기가 차단되자 암흑이 밀려온다. 아무런 빛이 없는 공간이다. 여행을 하며 밤하늘의 별이 진짜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이런 때이다.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곳에서 별과의 조우다. 밤 사이 몇 번을 방문을 열고 나서며 그 별들과 이야기를 한다.
새벽녘 산새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다. 방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숲 속 통나무집 앞에 내가 서 있었다. 자연과 하나이고 그 속에 내가 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천연 풀장에서의 물놀이, 초들 들고 키를 넘는 물속을 헤매는 동굴 탐험, 동네의 꼬마들과 함께 하는 튜빙 등 즐거운 하루를 누린다.
유럽과 미국의 도시 지역을 벗어나니 나 자신이 살아나는 것 같고 평안해진다. 역시 나는 촌놈이다. 여행이 길어지며 느끼는 것은 어떤 곳을 가는가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만나는 사람이 좋으면 그곳이 좋은 곳이 된다.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기어이 물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이들이다. 며칠 후면 헤어지겠지만 지금 동행하는 이들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