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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Dec 29. 2023

사랑의 증명

구의 증명_최진영

 들어가며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니 무엇이라 정의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마음을 우리의 눈앞에 가져오기 위해 수많은 연인과 작가들이 노력했을 겁니다. 그러니 ‘별도 달도 따다 줄게’라는 말은 인류의 애정사에 한 획을 그은 혁신적인 표현이라 할 만합니다.


 <구의 증명>에서는 사랑을 ‘식인’으로 나타냅니다. 뼈에 새기거나 가슴에 묻는 게 아니라, 사람을 먹어서 기억하겠다니. 발상 자체가 파괴적이고 참신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남자주인공 구의 죽음에서부터, 그리고 여자주인공 담의 식인행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까.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중략) 기억이 나의 미래. 나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노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고 노마는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 어렸고 노마는 죽지 않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데 그런데도 왜 죽었을까. 노마의 죽음을 제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고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 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면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 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 걱정하는 마음? /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누나는 봉인된 내 감정의 염통을 풀어주었고, 덕분에 내 안에 얼마나 시뻘건 핏덩어리가 담겨 있는지 알게 되었다. 모르고 살았으면 훨씬 편했을까?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표현하기 된다는 건 과연 좋은 일일까?
전쟁 중에 태어나서 전쟁만 겪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중략) 전쟁이나 질병은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과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중략)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들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네가 지금 죽더라도 우리 영혼이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중략) 다시 태어나 다른 존재로 만난 너를 내가 사랑하게 될까. 다른 존재인 나를 네가 사랑해 줄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중략)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 보자.



 마치며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었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한 문장씩 넘기는 게 아까울 지경이었지만, 워낙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참신한 소재 덕분에 몰입력이 좋아 한 호흡에 끝내버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읽어 충분히 책을 음미하지 못한 탓인지, 이 책의 제목이 <구의 증명>인지 대해서는 완독하고 나서야 의문이 생겼습니다. 증명이라는 단어를 다시 찾아봤습니다. 증명이란 ‘어떤 사항이나 판단 따위에 대하여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증거를 들어서 밝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의 증명이라 함은, 담이가 구를 먹음으로써 한 몸이 되었음을, 담이는 구를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임을, 구를 여전히 사랑함을 보이려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처음에는 그로테스크하다 싶었습니다. 제목도 익숙한, 많은 이들이 읽은 대중적인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첫 장면부터 사람을 먹어서 당황스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먹는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다 보니 ‘식인이 야만적인가’라는 담의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오히려 구가 처한 처지가 야만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진 빚 때문에 사채업자로부터 독촉에 시달리고, 도망치면 무지성으로 폭행을 당해야 하고, 산중에 사는 청설모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으니까요.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등등 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을 꼬집어 낸 듯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것을 꼭꼭 씹어내야 할까요. 이야기 자체는 짧았지만, 잊고 살았던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생이 다 해도 끝나지 않는 구와 담의 사랑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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