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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Jan 12. 2024

내 눈에만 보이는 것들

가녀장의 시대_이슬아

들어가며


 '가부장'의 반대말은 '가모장'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녀장’이라니. 작가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라 더욱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여성의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남자와 여자를 놓고 비교했다. 그런 얘기가 나오면 감정의 골이 급속도로 깊어졌다. 그런데 <가녀장의 시대>에는 기존에 남성들이 해오던 일을 도맡아 하는 mz 여성이 있다. 자녀를 한 가정의 리더로 등극시킨 작가의 접근법이 아주 신선했다.


 그녀는 '부모'라 얘기하지 않고 꼬박꼬박 '모부'라고 얘기했다. 맞는 말이다. 굳이 '아비부' 자가 '어미모' 앞에 반드시 와야 할 이유는 없다. '연고전'이 되었다가 '고연전'이 되는 것처럼, '부모'가 될 수 있으면 마땅히 '모부'도 맞는 말이다. 사고가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인지, 단어가 인식을 만드는 것인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세상이다.


 이런 이야기는 사석에서도 나누기 조심스럽다. 꺼내는 순간 비난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다 못해 반박 당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그녀의 유쾌함이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구절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복귀 노동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날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한다. 장을 보고 냉장고를 경영하고 식재료를 다 다듬는다. 시아버지랑 살 때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도 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세 보이려는 타투는 오히려 더 약해 보여요. 아름다운 아저씨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아빠 같은 중년 남자일수록 겸손한 귀여움을 추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에요." 며칠 뒤웅이는 슬아가 직접 그려준 도안을 들고 타투숍에 간다. 몇 시간 후 오른팔에는 청소기를 왼팔레는 대걸레를 새긴 웅이가 집에 돌아온다.
"젊음은 괴로워...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거든." 복희가 묻는다. "그게 행운이지, 왜 괴로워?"
정수리를 굴리던 슬아가 대답한다. "다 해봐야 할 것 같잖아. 안 누리면 손해인 것 같잖아." 복희는 다 해볼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도 이미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이렇게만 말한다. "인생에서 손해 같은 건 없어." 정말 그런가, 하고 슬아는 생각한다. "누굴 얼마나 만나봐야 진짜 충분하다고 느낄까." 복희는 그런 충분함 같은 건 영원히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의 앞날엔 아직도 무수한 데이트가 남아 있을 테니까.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 앉아 글을 읽는다. (중략)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중략)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머리는 제가 더 짧고요. 힘은 언니가 더 세요." 야무진 여자도 말한다. "옷장을 보면 얘는 바지가 많고 저는 원피스가 많아요." 늠름한 여자가 다시 덧붙인다. "근데 출산은 제가 할 거고, 돈은 언니가 더 잘 벌어요. 이렇게 되면 누가 여자 역할이고, 누가 남자 역할이죠?"
"또 한 번은 오른팔이 절단된 분이 오셨어. 그분한테 딱 맞는 수영을 내가 할 줄 알아야 하니까 이번엔 오른팔을 꽁꽁 묶고 왼팔로만 연습해 봤어. 다 방법이 있더라고."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은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 인체로 말이다. 슬아가 아직 탐구 중인 그 일을 미래에 아이는 좀 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마치며

 '가녀장의 시대'에서 가부장을 대표하는 인물이 그녀의 할아버지라서 좋았다. 그녀가 몹시 애정하는, 그리고 그녀를 몹시 아꼈던 그런 할아버지라서 말이다. 만약 엄마 대 아빠의 구조로 접근했다면, 나는 딸인지라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마음이 더 이입 됐을 것이다. 그럼 결국 단순히 성별 감정 문제로 치닫지 않았을까. 성별에도, 나이에도 구애받지 않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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