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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Jan 16. 2024

대화의 만찬으로 초대합니다

내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


# 프로 지방러의 항변


 나는 프로 지방러다. 콜레스테롤 가득한 뱃살을 떠올렸다면 넣어두시길. 여기서 지방러란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진심으로 지방 생활을 사랑하기에 '프로'까지 붙였다. 나고 자란 분지를 사랑하는 내게,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큰 곳을 꼽으라면 단연 서울이다.


 점심으로 우동 먹으려고
일본 다녀왔어요.


 요즘은 편도 두 시간이면 일본도 갈 수 있다. 점심으로 우동, 저녁으로 초밥을 먹으러 해외로 가는 게 가능한 시대다. 그러니 괜히 서울이 더 멀게 느껴진다. 대구에서 서울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린다.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는 하나, 공항이나 기차역이나 내게 소요되는 시간은 똑같다.


 거기다 버스라는 저렴한 선지가 있음에도 매번 기차를 선택하게 되는 것도 괘씸하다. 버스만 타면 구석구석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장기들이 한껏 존재감을 드러낸다. 예민한 대장의 소유자에게 서울은 멀고도 먼 곳일 뿐이었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


 유달리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삶은 달걀도 없이 떠나는 기차 여행인데 이렇게 기분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다. 대학 동기들과는 매년 한 번씩 모이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출발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다. 콘센트가 있는 자리까지 차지하다니. 운이 좋다는 시답잖은 감상과 함께 기차가 출발했다. 조심해서 오라는 단톡방 알람이 울렸고, 이내 '이 모임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기다려지는 건가' 생각에 빠졌다.


여긴 교육 고등학교야.

 교육대학교 학생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다.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자고로 대학생활이라 하면 넓은 캠퍼스를 누비고, 타 과와 함께 수업도 듣고, 그러다가 풋풋한 사랑도 싹트고 그래줘야 하는 게 아닌가.


 교육대학교는 사정이 다르다. 전공수업부터 교양수업까지, 1학년 때 꾸려진 반 그대로 4학년까지 함께 수업을 듣는다. 휴학생이 없으니 복학생도 없다. 남학생들 조차 임용고시에 통과한 뒤 입대 하는 것을 선택한다. 중간에 CC를 하다 헤어지는 경우라면 모를까. 이렇게 함께한 4년이라는 시간은 참 귀하다. 언제 만나도 이야기가 통하는 인연을 맺어준다.


 나는 고달픈 일이 있으면 말을 하며 풀곤 했다. 내 일같이 열 올리면서 공감해 주는 친구를 보며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하고, 한참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 이상한 데 빠져 깔깔 웃으면서 넘기기도 했다. 그런데 발령을 받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두 말하지 않아도 찰떡콩떡 통하던 동기들은 흩어져버렸다.


 그 이후로는 서글픈 일을 토로하고 싶어 입을 떼었다가도 금방 입을 닫게 되었다. 사건의 등장인물을 설명하다 진이 빠지니 본론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운을 잃은 것이다. 힘든 일을 설명하는 게 더 힘들어 입을 닫았다. 언젠가부터 말하지 않는 게 미덕이 된 것만 같았다.


# 근사한 한 끼 식사


 대화에 갈증을 느낄 때, 관심이 필요할 때쯤 동기들을 만난다. 이 파티에 참여하면 아주 재밌는 방식으로, 생각지도 못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올해는 대화 메뉴판이 등장했다. 놀랍게도 파티 주최자에게는 어떤 커미션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품을 들여 이런 멋진 아이디어를 낸다. 그녀가 진정 대화를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좋은 대화는 꼭 잘 차려진
식사를 한 듯한 만족감을 줍니다.

메뉴판 속 질문들이 우리를 풍성한
대화로 이끌어주길 바라며 준비했습니다.

대화는 물음표로 시작하지만,
대화를 마칠 즈음에는
기쁨의 느낌표로 끝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번 파티는 ‘나는 솔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뽑기 통에서 랜덤으로 꺼낸 번호표를 받은 뒤 같은 번호의 초대장 앞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운명의 상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참여자는 총 14명. 비교적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규모지만, 운명의 짝짓기는 기존의 친소관계를 가볍게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 너는 나의 뮤즈, 나는 너의 마니또

 사실 파티는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다. 마니또가 정해지면 그 사이 적어도 한 번은 연락해야 하고, 2만 원 선에서 선물을 마련하는 것이 규칙이다.


 매년 느끼지만, 2만 원은 참 어정쩡한 금액이다. 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금액이랄까. 괜찮은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는 정말 고심해야 한다. 올해 나는 독서링을 받았다. 글을 쓰게 된 것도, 쓰기 위해 책을 많이 읽고 있는 것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해 더욱 귀한 선물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선물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이만큼 타인을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선물을 선물답지 않게 대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대화가 끝나면 또 하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번호가 쓰여 있던 초대장은 사실 엽서다. 뮤즈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기 전, 이 대화를 통해 느낀 점을 쓴다. 한 시간 동안 집중해 이야기를 나눈 상대에게 위로와 격려의 쪽지를 받으면 실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주최자의 물음표를 따라 한참 대화를 향유하다 보면 둘 만의 풍성한 식사가 차려진다. 그리고 긴 대화를 끝맺을 때쯤 비로소 느낀다. 주최자는 실로 주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을. 내 곁에 이런 따뜻한 사람이 있음을. 감사히도 내 주변에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당신이 한 때 이곳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사람의 생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곱씹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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