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편
초등학교 때 체력장으로 오래 달리기를 하면 항상 중간보다 뒤에서 들어왔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열심히 달려야 겨우 체력장 커트라인을 통과하는 정도였다. 오래 달리기는 매년 할 때 마다 괴로웠다.
나는 달리기에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특히 반 대항 계주를 할 때 반 대표로 나가 달리기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느 날 문득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집에서 2km 거리에 천지연폭포가 있었는데 주말마다 새벽에 뛰어갔다가 폭포 앞에 있는 약수를 마시고 다시 집까지 뛰어왔다.
집에서 천지연으로 갈 때는 내리막 길이었는데 올 때는 오르막 길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새벽에 그렇게 뛰고 나면 하루 종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혼자 뛰었지만 나중에는 친구도 몇 명 설득해서 같이 뛰었다.
좋은 것은 같이 하고 나누면 더 좋은 거니까.
달리기를 좋아해서 합류한 친구는 없었다. 간신히 친구들을 설득해서 달리기에 끌어들였는데 친구들이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내가 친구집에 가서 자고 있는 친구를 깨워 함께 달리기를 하러 갔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주말인데 얼마나 더 자고 싶었겠는가.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라니. 그렇게 두 달 정도는 달리기를 지속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한번씩 빼먹다 보니 어느 순간 달리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시작했다가 그렇게 흐리부지 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OBC에서 훈련을 받을 때 달리기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군인으로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체력인데 달리기는 기초 중에서 기초니까. 자대에 가면 소대장으로서 매일 아침 소대원들과 함께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뒤처지면 그걸로 군생활 끝나는 것이었다. 자대에 배치되기 전 4개월 동안 달리기를 많이 하고 체력을 키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OBC 훈련 기간동안 일과가 끝나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당시 내가 생활하던 막사는 훈련소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거기서 정문까지 내려 갔다가 올라오는 코스로 달리기를 했다. 그렇게 4개월 정도 꾸준히 달리기를 하다 보니 체력이 좋아지고 달리기가 재미있게 되었다. 엔돌핀이 온 몸에 퍼지는 느낌과 함께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도 가끔씩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OBC 훈련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기동중대 소대장으로 발령 났다. 기동중대는 언제 있을 지 모를 출동에 대비해 구보(달리기)와 특공무술이 생활화된 부대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대원들과 5킬로미터 달리기를 하고 저녁에는 개인적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달리기를 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논길을 따라 달렸다. 어둠속을 달리다 보면 처음에는 깜깜하기만 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은 암순응하고 조금씩 주위에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마을과
희미하게 보이는 가로등 불빛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반딧불이 불빛
그리고 주위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귀뚜라미의 협연
진하게 풍겨오는 풀 내음과 달릴 때 느껴지는 흙의 보드라운 감촉들
이 모든 것을 혼자 누리기가 아까워서 나중에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그 길을 달렸다. 당시 말년 대위였던 정훈장교와 자주 달리기를 했다. 한번은 보름달이 훤하게 떠 있고 공기가 좋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20킬로미터 정도를 달렸다. 뭔가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우리를 비추고
있었던 보름달의 은은한 빛깔과
대월마을의 정취, 흙의 감촉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