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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남 땅끝 마라톤

달리기 편

by 봉봉주세용

군대에서 유격훈련은 행군으로 시작해서 행군으로 끝난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서는 40킬로미터 야간 행군을 하고 다음 날 유격장으로 이동하여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격훈련 마지막 날에도 야간행군을 하고 훈련을 마무리했다.


40킬로미터 행군 전날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


해남에서 열리는 땅끝 마라톤 대회였는데 부대에서 한시간 반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하면 해남에 갈 수 있었다. 함께 근무하는 병기관이 마라톤 매니아였는데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마라톤 다음 날 행군이 있어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또 해남에서 마라톤을 해 볼까 싶어서 출전하기로 했다.


정식으로 대회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병기관은 풀코스를 신청했고 나는 하프코스로 참가했다. 대회 당일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일어났다. 가볍게 부대 주변을 한바퀴 돌고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해남으로 이동했다. 마라톤 대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 몰랐다. 참가자뿐 아니라 응원을 하기 위해 온 가족이 출동한 것 같았다. 돗자리를 깔고 간식을 먹으며 응원하는 모습이었다.


대회라기 보다는
축제같은 느낌이었다.


출발을 앞두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데 부대 작전과장님이 보였다. 아버지가 마라톤에 참가하는데 응원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작전과장님은 다음 날 행군을 해야 하는데 마라톤을 뛰어도 되느냐고 걱정해주었다. 달리기는 평소에 취미로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얘기했다.


출발 신호와 함께 힘차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꽤 많아 초반에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5분 정도 달리다 보니 정체도 없고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몸이 가볍고 컨디션이 좋았다. 더 빨리 뛰고 싶었는데 힘을 많이 쓰면 후반부에 힘들까봐 자제하며 달렸다.


도로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화이팅을 외쳐주고 어떤 이는 몇 백미터를 같이 뛰어주며 힘을 주었다. 햇살이 뜨겁지 않았고 적당히 구름도 있어 달리기를 하기에 최고의 환경이었다. 10킬로미터 정도 갔을 때는 도로 옆에 있는 음료수를 집어서 마셨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함께 달린다는 것이 참 좋았다. 하지만 15킬로미터를 지나서부터는 즐겁지 않았다.


부대 밖에 있는 흙길만 달리다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거라 무릎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무릎 관절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팠다. 내가 그 동안 달리기를 할 때 아파본 적이 없는 부위였다. 아마 그렇게 무리해서 달린 적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증이 시작되고 나서는 어떻게 골인점까지 달렸는지 모를 정도로 힘들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달리는 속도가 걷는 것과 비슷해졌다. 뒤에서 달리던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앞질러 가기 시작했는데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나도 쭉쭉 앞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겨드랑이도 털에 쓸리며 따끔거렸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더 가야 골인지점이 나올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고 마지막에 좀 뛰어볼까
내일 행군이 있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그만하자


달리면서 계속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걷고 싶었고 멈추고 싶었다. 달리기를 할 때 항상 즐거웠는데 이번에는 즐겁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사이 어느 새 골인지점을 지났다. 골인하고 나서 그대로 엎드린 채 한참 누워있었다. 보통 달리기를 할 때 마다 기록을 재고 체크했다. 하지만 골인하고 보니 기록은 큰 의미가 없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

맑은 하늘을 보며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달렸다는 것

달리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달렸다는 것

그리고 달리기를 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축하할 일이었다. 나는 골인지점에 서서 한참동안 골인하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땅끝 마라톤.jpg


그 후 한참 동안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 하프 마라톤 완주 이후에 한동안 무릎이 아파 달릴 수 없기도 했고 뭔가 달리기에 대한 재미를 잃었다고 해야 할까. (마라톤 대회 다음 날 행군은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무릎이 아파 한동안 고생했다)


평소에 달리기를 할 때마다 시간을 재서 기록하고 그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노력했다. 목표를 설정하고 측정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라톤 대회 이후로는 달리기를
할 때 시간을 재지 않게 되었다.


달리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천천히 달리면서 달릴 때의 즐거움을 온 몸으로 느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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