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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스비 캔커피

커피 편

by 봉봉주세용

제주에 오는 관광객이 서쪽 여행을 할 때 필수로 들르는 코스가 있다. 진한 초록색의 녹차 잎이 출렁이는 오설록 티 뮤지엄. 그리고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세워진 추사 김정희 기념관. 오설록을 지나다 보면 파란 바다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초록의 녹차 잎이 넘실넘실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한여름에는 더욱 선명한 초록의 빛을 내뿜으며 반짝인다. 녹차의 파도를 지나 남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추사 김정희 기념관이 나온다. 15년 전 뜨거웠던 여름 나는 오설록에서 추사 김정희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서 있었다.




오설록과 김정희 기념관 사이 도로에 하수도관을 심는 공사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오설록은 오픈한 지 얼마되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추사기념관 역시 당시에는 기념관이 아니라 추사적거지라고만 이름 붙여진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동네사람이 거의 전부였고 지나가는 차도 드문 한적한 도로였다.


하수도관을 심기 위해서는 우선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야 한다. 마을길이라 도로 폭이 좁기 때문에 차가 지나가기 위해서는 신호가 필요했다.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잠시 포크레인 작업을 멈추도록 신호를 보내고 이미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으면 잠시 차를 대기시키고 포크레인에게 멈추도록 신호를 준 후 차를 보내야 한다.


길에 서서 신호를 주고받는 일이 내 주 업무였다. 하얀색 안전모를 쓰고 주황색 형광 조끼를 입고 안전화를 신었다. 오른손으로 빨강 경광봉을 들고 안전하게 포크레인이 작업하고 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신호를 봤다.


길이 1차선일 때는 도로 양끝을 막고 차를 한대씩 보내야 할 때가 있다. 양 방향에서 동시에 차가 오면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한쪽 끝에서 차를 보내면 다른 한쪽 끝에서는 차를 잡고 있어야 한다. 보통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인데 그 거리가 길어지면 무전기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차를 잡고 보내야 한다.




한번은 차량 이동이 드문 거리에서 신호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쪽에서 작업하던 포크레인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는데 2시간 정도 지났을 때는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작업 시작할 때 내 쪽에 있던 나무 그늘은 시간이 흐르면서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결국 땡볕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유일하게 길 반대편에 있는 전봇대 하나가 가느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전봇대의 가느다란 그늘에 몸을 숨기고 땡볕을 피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차는 없고 공사 장비와 사람들은 멀리 있었다. 멀리서 아득하게 포크레인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네 아주머니가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작업이 시끄러워 컴플레인을 하려나 보다 싶었다. 아주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몸빼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로 옆에 있는 밀감밭에서 작업을 하다가 온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내 앞으로 와서 들고 있던 검정 비닐봉투를 건네 주었다.


봉투 안에는 파란색 레쓰비 캔 커피가 10개 정도 들어있었고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것 같이 차가웠다. 밭일 하러 갈 때 한번씩 봤다면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눠 마시라고 했다.


하수도 공사를 할 때 초반에는 포크레인 소리가 시끄럽다고 동네 어른들이 한마디씩 하셨다. 하지만 나중에는 더운 날 고생한다며 한번씩 시원한 얼음물, 커피, 음료수, 수박 등을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레쓰비를 보면 그 동네 어른들의 따뜻한 마음과 아주머니께서 가져다주었던 차갑고 달달한 레쓰비 캔 커피 맛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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