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노량진은 여전히 수험생들로 북적였다. 아침마다 수 많은 학생들이 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민수씨도 경찰공무원 전문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했다. 몇 년전 공부했을 때와 내용은 비슷했지만 그래도 최신 출제 경향에 맞춰 준비를 해야 했다.
점심 시간에는 학원 근처에 있는 한식 뷔페집에서 간단히 쿠폰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쿠폰은 10장에 4만원이었는데 쿠폰 한장으로 푸짐하게 점심 한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학원 근처를 산책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김민수씨 아니세요?” 낯선 이는 조심스럽게 김민수씨의 얼굴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김민수 맞는데요. 혹시 누구세요?”
“나 준기다. 홍준기. 고등학교 때 니 문과였지? 나는 이과였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이 익었다.
홍준기.
홍준기.
민수씨는 이름을 되뇌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키가 크고 잘생긴 준기씨는 학교에서 유명했다. 알바로 한번씩 모델일을 한다는 얘기도 있었고 인기가 많아 주변 여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준기씨를 보기 위해 학교로 찾아오곤 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반대항 체육대회 때 농구 결승전에서 준기씨 반을 만났다. 준기씨는 그 반의 센터로, 민수씨는 가드 포지션이었다. 준기씨는 키가 컸지만 운동 신경도 있었다. 민수씨도 분발했지만 역부족이어서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민수씨는 준기씨가 농구를 참 잘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지나다니며 본 정도였지 말을 섞어서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고향 친구를 노량진에서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준기씨는 해맑게 웃었고 둘은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날 저녁 민수씨와 준기씨는 학원 근처에 있는 막창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준기씨는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3년째 노량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그는 노량진이 편하다고 했다. 음식값도 싸고 주위에 피씨방과 만화방도 많이 있어 심심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가는 생생한 느낌이 좋다고 했다.
서울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준기씨는 한 동안 잡지 모델일을 하고 연극 무대에 섰다고 했다. 영화도 몇 편 찍었는데 짧게 지나가는 단역으로 나왔다고 했다. 준기씨는 연예인을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연예계가 냉혹한 프로의 세계이고 대부분의 연예인 지망생은 매우 힘들게 생활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빽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공무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민수씨는 자신이 몰랐던 고등학교 때 모습을 준기씨에게 듣게 되었다. 민수씨는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준기씨는 민수씨가 동급생들에게 우상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민수씨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 다리가 불편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는 있었으나 걷는 속도가 느렸다. 그 친구는 1년 동안 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이 될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민수씨는 1년 동안 그 친구와 함께 통학을 했다.
한번은 등교시간이 늦어 2학년 선도부 선배가 민수씨와 그 친구에게 나쁜 말을 했는데 민수씨가 그 자리에서 돌려차기로 선도부 선배 얼굴을 차 버렸다.
그 선배는 무섭고 주먹이 세기로 유명한 선배였는데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바로 학교에 소문이 퍼졌다. 그 후 선도부에서 민수씨를 혼내주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민수씨의 기에 눌려 아무도 그와 친구를 건들 수 없었다.
민수씨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준기씨를 비롯한 학교 친구들은 그런 민수씨를 사나이라고 생각했고 준기씨도 그런 민수씨와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둘은 그날 소주를 5병이나 마셨다. 오랜만에 본 동창끼리 반가웠고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민수씨는 짧은 노량진 생활을 하며 누군가와의 대화가 간절했고 준기씨는 학창시절 전설이었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신이났다. 민수씨와 준기씨는 그날 이후 절친이 되었다.
민수씨는 노량진 생활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1주일이 2번씩 스터디 모임을 했는데 멤버들과 친해지면서 가끔 저녁식사를 했다. 다들 궁색한 처지라 비싼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은 할 수 있었다.
돼지 껍데기는 종이장 같이 얇았고 조금만 더 구워도 딱딱한 과자처럼 변했지만 맛은 일품이었다.
특히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스터디 멤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스터디 멤버는 원래 6명이었는데 2명은 중간에 나갔고 4명이 모임을 유지했다. 구성원은 남자 2명, 여자 2명이었는데 민수씨는 그 중 새롬씨와 얘기를 많이 했다.
새롬씨는 23살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마지막 학년을 휴학하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롬씨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군복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군인이나 경찰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새롬씨는 군인이 더 끌렸으나 여자가 군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는 아버지의 만류로 경찰로 방향을 돌렸다고 했다. 새롬씨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똑부러지고 생각이 꽉찬 여자였다. 민수씨는 그런 새롬씨에게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 새롬씨가 있었기 때문에 스터디 모임이 더 기다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따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새벽 잠이 많은 새롬씨를 위해 민수씨가 새벽 6시에 모닝콜을 해 주었고 새롬씨는 영어가 약한 민수씨를 위해 한번씩 영어 문법 정리를 해서 가르쳐 주었다. 스터디 모임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둘은 사귀고 있는 것을 비밀로 했는데 스터디를 할 때마다 민수씨는 묘한 짜릿함과 즐거움을 느꼈다.
새롬씨는 꽤 넓은 원룸에서 자취를 했는데 민수씨는 새롬씨 원룸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주말에는 새롬씨 원룸에서 치킨에 맥주 한잔을 하며 최신 영화를 다운받아 노트북으로 봤다. 극장에서 보는 화면에 비할 수 없었지만 그 시간이 민수씨와 새롬씨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다.
민수씨는 새롬씨와 나란히 경찰에 합격해서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상상을 했다.
순찰차에 타서 함께 순찰을 다니고 저녁에는 악당을 잡고 사건 현장에서 치열하게 범인의 흔적을 찾고 퇴근할 때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손을 잡고 퇴근하는 생활.
퇴근할 때 가끔은 동네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러 닭발을 먹으면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그날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얘기하고 서로 취기가 올라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에 도착하면 서로 꼭 껴안고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토닥이는 그런 저녁.
민수씨는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험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시험 결과가 나왔다.
새롬씨는 합격이었고 민수씨는 떨어졌다.
원래 경찰 시험은 남자보다 여자가 불리하다. 남경보다 여경이 채용인원이 훨씬 적어 합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새롬씨는 최종 경쟁률 350대 1을 뚫고 경찰이 되었다. 민수씨는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고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또 간발의 차로 불합격이 되었다.
새롬씨는 첫 시험이었는데 합격을 했다. 민수씨는 새롬씨 보기가 부끄러웠다. 공부를 한 기간도 새롬씨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나이도 어느 덧 20대 후반이었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길을 가다보면 흔히 보이는 것이 경찰인데 왜 그렇게 민수씨에게는 경찰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준기씨도 공무원 시험에 또 떨어졌다. 커트라인에 한참 못 미치는 점수로 떨어진 준기씨는 민수씨처럼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수씨를 위로해 줬다.
일주일 동안 준기씨와 새롬씨, 민수씨는 4번 술자리를 했다. 술을 마실 때 마다 민수씨는 처음부터 술을 빠르게 마시며 취해 쓰러졌고 그런 민수씨를 준기씨와 새롬씨가 집까지 데려다 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새롬씨는 그런 민수씨를 이해할 수 있었고 보살피고자 노력했다. 준기씨는 좌절하는 민수씨를 보며 안타까웠다.
민수씨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경찰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번에 시험에 합격하고 어떤 이는 몇 년동안 수차례 시험을 봐도 합격하지 못한다는 것. 이게 참 답답한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머리와 환경이 다르고 절대적인 투입시간, 상대적인 집중도라는 변수가 있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는 간절함은 누구나 갖고 있는데 능력이나 운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 간절함은 큰데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그 좌절이 클 수 밖에 없다.
준기씨 역시 노량진에서 생활하며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스스로 합격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량진에서 떠나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하지만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다.
민수씨는 준기씨와는 다르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기대하고 간절해 지는 것이었다.
떠나야 하지만 떠날 수 없는 것.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민수씨도 곧 깨닫고 체념하게 될 것이라고 준기씨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