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 좋던 나쁘던 백문이 불여일견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40

by chill십구년생guy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이
폰 잃고 밤 길 조심하기



로마의 테르미니 역 주변은 소매치기와 날치기 등 여행객을 겨냥한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다. 주이탈리아 대사관에서도 테르미니 역을 이용하거나 주변 민박, 호텔에 숙박하는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항상 경고를 내린다. 특히 야간에 골목을 혼자 다니는 것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안내문을 흔히 접할 수 있다.


나와 친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술기운과 분위기에 취해 경계심이 조금씩 흐트러졌고, 결국 정줄을 살짝 놓은 사이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분명 더 조심했을 텐데, 순간의 방심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틈을 만들었다.



테르미니 역 앞은 소문난 경범죄 우범지대이다



슈퍼에 들어온 친구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여전히 술이 덜 깬 탓에 말은 횡설수설이었다. 이리저리 끊어지는 이야기를 맞춰보니, 대략 상황은 이러했다.


잠시 전, 그는 통화를 마친 뒤 거리 풍경을 찍고 스마트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문제는 코트였다. 오버핏 디자인이라 누가 슬쩍 손을 대더라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헐렁했다. 친구는 그대로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기대 슈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뒤에서 현지인 몇 명이 급히 내려오는 것처럼 다가오더니, 어깨를 밀치듯 툭 치고 지나갔다고 했다.


에스컬레이터 폭이 좁아 순간 몸이 흔들렸지만,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다 내려와 무심코 주머니를 만지는 순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주머니 속에 있던 스마트폰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친구에게 방금 슈퍼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곧장 손짓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멀리서 보니 물건을 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고, 괜히 우리 쪽을 흘깃거리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한눈에 수상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곳이 가드가 상주하는 큰 슈퍼라는 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용기를 내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황상 심증은 있지만



예상대로 그들은 모른다고 발뺌했다. 더 난감한 건, 슈퍼 안 직원들조차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번역 앱을 켜고 가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 우리 편을 들어주었지만, 일당은 끝내 모르쇠로 일관했다.


실랑이가 이어지던 중, 갑자기 한 남자가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바지를 훌훌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자기 몸을 직접 뒤져보라며 제스처를 취하는데, 그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더 난감해졌다.


나는 속으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옆에 있던 친구의 표정은 더 답답해 보였다. 술이 덜 깬 얼굴, 흐릿한 말투, 애매한 기억까지 겹쳐 증언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의심해도 그들을 붙잡아 둘 방법은 없었다. 결국 친구는 체념한 듯 “그만 됐으니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자자”라며 손을 내저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눈앞에 범인이 있는 것 같은데,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허탈한 마음으로 결국 포기하고 숙소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이 주변이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눈을 뜨자 친구는 이미 노트북을 켜놓고 있었다. 구글 계정을 통해 스마트폰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지도 위에 찍힌 좌표는 전날 사건이 벌어졌던 슈퍼 근처였다. 핸드폰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틀 정도가 흐른 뒤에야 위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마 시내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듯하더니, 결국 어느 순간 바다를 건너버렸다. 이제 핸드폰을 되찾을 가능성은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곱씹어보니, 아마 그 일당은 슈퍼 어딘가에 기기를 잠시 숨겨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챙겨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애초에 소매치기를 당한 이상, 설령 우리가 더 끈질기게 실랑이를 벌였다 하더라도 되찾기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이번 일은 그저 “로마에서의 값비싼 경험”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 후로 우리의 일정은 조금 달라졌다. 친구와 나는 호텔을 벗어나기만 하면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비상 상황에 대비해 챙겨온 시연용 안드로이드 폰이 한 대 있었고, 여기에 계정을 연동해 친구의 데이터를 복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유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친구는 내가 열어주는 핫스팟에 의존해야 했고, 우리는 강제로 한 몸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트레 폰타네 수도원, 천사의 성, 나보나 광장을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커플처럼 늘 붙어 다녔다. 물론 가끔 불편할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와이프 선물을 사러 갈 때처럼, 잠깐이라도 혼자 움직이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떨어질 이유가 없으니 그냥 함께 다니곤 했다.



덕분에 남이 찍어준 사진도 잔뜩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덕분에 일정 내내 서로를 챙기며 다닐 수 있었고, 불필요한 불안감도 덜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로마의 남은 날들을 서로 의지하며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후일담



로마에서의 기억은 오래도록 강렬하게 남았다. 무엇보다 테르미니 역의 악명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겪고 나니, 그 충격은 남달랐다. 이전까지는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대수롭지 않게 돌아다녔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사람들이 왜 특정 장소를 꺼리고 조심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낯선 도시의 어두운 면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디어의 씨앗이 되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발길을 꺼리는 장소를 누구나 온라인에서 안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탄생한 것이 현실의 장소를 가상 공간에 그대로 구현하는 ‘VR 디지털 트윈(Virtual Reality Digital Twin)’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이 기술을 연구하고 다듬어, 마침내 우리만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대구에서 사업을 이어가던 우리는 지역과 연결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시민들이 사랑하는 명소 ‘수성못’을 VR 세계에 구현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디지털 트윈 프로젝트는 전 세계 120여 개국 이용자들이 방문하는 ‘갤럭시티 월드’ 안에 담겼고, 공개되자마자 관계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업데이트를 앞두고 공식 페이스북 게시물



처음 만난 사람과 친밀감을 쌓기 위해 공통 관심사를 찾듯, 우리가 대구의 상징적 공간을 가상 세계에 담아낸 것은 지역 사회와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각종 기관과 기업들과 협력할 수 있었고, 이미 선발된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C-Lab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지역 내 다양한 지원사업에도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로마에서의 사건은 직접 겪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체험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예상치 못한 사업적 성장을 이끌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새로운 여정 속에서 또 한 번 뜻밖의 영감을 만나게 된다. 그 경험은 추후 회사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다음편, '중국 충칭 : 지평을 넓혀서 세계의 흐름 위에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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