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47
이 타이밍에 이러면
곤란한데
2019년 6월, 나는 TIPS 재도전을 준비 중인 회사를 위해 ‘해외 네트워크 확장’이라는 막중한 숙제를 안고 있었다. 2주 동안 세 나라를 오가는 강행군, 말 그대로 ‘투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연속된 국제 행사 참여가 이어졌다. 첫 번째 행선지였던 호치민을 뒤로하고, 이번 목적지는 태국 방콕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동남아 시장 진출을 이야기할 때면 태국보다는 으레 베트남, 인도네시아, 싱가포르가 먼저 언급된다. 실제로 태국은 기술 산업보다는 자동차와 전자 부품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비중이 높다. 그런 이유로 나는 컨텐츠 기반 기술기업인 우리 회사와의 접점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따라서 이번 방콕 일정 역시 큰 기대보다는, 선정되었으니 예의상 들러야 하는 경유지 정도로만 여겼다.
나에게 태국은 그저 관광지였다. 휴양과 미식, 그리고 미소의 나라. ‘비즈니스 기회’라는 단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이자 맘모식스의 대표는 달랐다. 그는 한국외대에서 태국어를 전공했고, 방콕에서의 해외 연수 시절을 포함해 태국 문화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는 종종 태국을 글로벌 시장 진출의 전초기지로 언급하며, 언젠가는 꼭 진출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이번 투어의 일환으로 방콕에서 열린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주최의 K-Contents Expo 2019에 참가하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그곳에서 태국 시장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더 나아가 해외 네트워크 확장이라는 과제가 단순히 계약이나 제휴 건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현지 수준을 직접 체험하고 깊이 이해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호치민 떤선녓 공항에서 비엣젯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방콕 수완나품 공항. 2시간도 채 안되는 짧은 비행 동안, 머릿속은 이미 다음 미팅 준비로 가득했다. 이번 방콕 일정은 K-콘텐츠 엑스포 행사 참가가 중심이었고, 현지 업체 미팅과 프레젠테이션도 연이어 예정돼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대표이사인 친구가 먼저 방콕에 도착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아, 그가 머물고 있는 아속(Asok) 시내로 향했다. 이동 중 통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묘하게 기운이 빠져 있었고, 대답 하나하나가 힘겨워 보였다. 순간 ‘뭐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친 뒤, 약속한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친구의 모습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안색이 허옇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한눈에도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그는 힘겨운 표정으로 “장염에 걸린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보다 이틀 먼저 방콕에 도착했던 그는 현지에 살고 있는 대학 동문들과 오랜만에 자리를 했고, 그 후 원인 모를 탈이 난 상태였다. 문제는 시점이었다. 당장 다음 날 아침부터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상황, 일정상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건 단순히 ‘대표가 아프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이번 방콕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바로 이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태국어가 능숙한 그는 현지 기업들과의 미팅 대부분을 직접 주도할 예정이었다. 나 역시 영어로 대화를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 때로는 통역이 필요한 경우가 잦았다.
즉, 그가 함께 있을 때 미팅의 밀도가 달라졌다. 통역 시간이 생략되니 같은 시간 안에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자연스러운 언어 감각 덕분에 분위기 자체가 훨씬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는 당장 내일 행사 참석조차 불투명한 것이었다.
어쨌건 저녁 시간이 되어 밥을 먹기로 했다. 친구의 상태를 보니 동남아 현지 음식은 부담스러울 것 같아, 근처 한식당을 찾아보았다. 검색해보니 숙소 바로 앞에 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다. 남한식이든 북한식이든, 일단 한식은 한식이니 그곳으로 정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종업원들의 복장이었다. 모두 단정한 한복 차림이었다. 예전에 출장 중 들렀던 두바이의 옥류관처럼 화려한 무대 의상이 아니라, 조금은 수수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그 낯선 조합의 색감과 분위기 덕분에 묘한 생경함이 느껴졌다. 북한 식당 특유의 정제된 공기, 그리고 1980년대 한국식 인테리어를 연상시키는 질감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평양 쟁반국수를 메인으로, 이북식 만두와 소적쇠구이를 함께 주문했다. 친구를 위해 죽을 찾아봤지만 메뉴에는 없었다. 친구는 “괜찮아, 나는 국물만 좀 먹을게”라며 웃었다.
음식이 나오고 한참 동안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고기와 만두를 먹다가 문득 입안이 느끼해져서 200바트를 주고 평양 통김치를 따로 주문했다. 그때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김치를 포함한 나물 반찬들을 메뉴판에서 ‘남새료리’라고 표기해 둔 것이었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북한에서는 채소를 ‘남새’라고 부른다고 했다. 신기한 표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콕 한복판에서, 태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어딘가 낯선 ‘제3의 공간’에서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묵고 있는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루프탑 펍 ‘BREWSKI’로 향했다. 방콕은 워낙 관광산업이 발달한 도시라, 소문난 루프탑 바 외에도 크고 작은 스카이바(Sky Bar)들이 도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높은 건물이 많은 만큼, 건물마다 저마다의 야경 명소를 품고 있는 셈이다. 역시 동남아 최고의 관광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가 머문 아속(Asok)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로, 주변에 대형 호텔과 레스토랑, 바가 밀집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BREWSKI는 다른 루프탑 바와 조금 달랐다. 위스키나 칵테일을 주종으로 하는 고급 바들이 대부분인 반면, 이곳은 맥주가 메인인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했고, 분위기도 더 캐주얼했다. 덕분에 한국인 여행자들에게도 ‘가성비 루프탑 바’로 제법 알려져 있다고 했다.
친구는 속이 좀 괜찮아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맥주잔을 들었다. 얼굴빛이 여전히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진 듯했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킨 뒤 그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더니, 다시 홀짝였다. 나는 괜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정말 나은 걸까, 아니면 그냥 괜찮은 척을 하는 걸까.
걱정이 되었지만,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일 우리는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화려한 방콕의 스카이라인이 빛을 내며 반짝였다. 그 앞에서 우리는 말없이 맥주잔을 부딪쳤다.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을 지나,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다음편, '태국 방콕 : 찰나의 순간을 절호의 기회로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