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48
맛있는 밥을 주신다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방콕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나와 친구는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호텔 문을 나섰다. 숙소는 번화한 아속(Asok) 지역이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그보다 조금 더 고전적인 정취가 흐르는 방락(Bang Rak) 지구였다. 택시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방콕 메리어트 수라웡세 호텔'. 바로 이곳에서 오늘부터 'K-Contents Expo 2019'의 막이 오른다.
행사장은 호텔 컨퍼런스 홀 전체를 아우르며 위용 있게 펼쳐져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상담 부스와 짜임새 있는 전시 공간을 보니, 주최 측에서 이 행사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그 세심한 손길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점심 식사가 무려 호텔 뷔페로 제공된다는 사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방콕 엑스포도 호텔 뷔페부터 시작인 법.
방콕 메리어트 수라웡세의 '프라야 키친(Praya Kitchen)'은 태국 전통의 풍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정도 퀄리티의 음식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니, 절로 "나이스!"라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친구의 컨디션이었다. 장염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밤에는 좀 나아진 듯 보였으나, 행사장 도착 후 한두 시간이 지나자 친구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표정에는 고통이 역력했다. 그나마 우리 전시 부스가 화장실 바로 앞이라 동선이 짧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행사 시작에 앞서 배정된 통역사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이후 나는 오전 세션의 회사 소개 발표를 위해 행사장 옆 회의실로 이동했다.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부스로 돌아와 보니, 다행히 친구는 통역사와 함께 예정된 미팅들을 차분히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오후 일정까지 친구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점심시간이 끝나는 대로 나도 부스 운영에 전적으로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본격적인 오후 미팅에 돌입했다. 현지의 여러 디지털 콘텐츠 개발사와 그래픽 전문 업체들을 차례로 만나는 일정이었다. 사실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그들의 수준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태국 업체들의 기술력과 감각은 두 달 전 중국 충칭에서 접했던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제시된 단가 또한 거의 비슷했다. 이는 곧 실력은 한국에 전혀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가격 경쟁력은 훨씬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이 명확한 격차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나니, 세계 시장의 흐름에 무뎌진 채 '우물 안 개구리'로 머물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위태로운 현실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날 미팅 명단에는 태국 디지털 경제 진흥원(DEPA) 관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콘텐츠진흥원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이 기관은, 태국 정부가 추진 중인 ‘Thailand 4.0’ 정책의 핵심 기구다.
2016년부터 디지털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온 태국은, 기존의 관광과 제조업 중심에서 벗어나 기술과 콘텐츠 중심 국가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현지 기업들이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준 이유도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국처럼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몇 달 후 DEPA 본사를 직접 방문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뒷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풀어보려 한다.
첫날의 공식 일정이 마무리되고, 저녁에는 주최 측이 마련한 네트워킹 파티가 열렸다. 행사장 근처의 트렌디한 펍에서 맥주와 음식을 나누며 자유롭게 어울리는 자리였다. 하지만 친구의 컨디션은 좀처럼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장염과 사투를 벌인 탓에, 저녁 무렵의 얼굴은 아침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결국 우리는 한창 무르익은 파티 분위기를 뒤로하고 조용히 숙소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튿날 일정 역시 전날과 비슷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오전 내내 긴밀한 상담이 계속되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훌륭한 호텔 뷔페가 우리를 맞이했다. 전날에 이어 음식의 수준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이쯤 되면 '업무를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업무를 하는 것인지' 살짝 헷갈릴 법도 했지만, 어쨌든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오후에도 여러 태국 로컬 기업들과의 미팅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이들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단순히 가격 경쟁력이 좋은 단계를 넘어, 완성도와 감각 면에서도 이미 국제적인 기준에 도달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들 상당수가 일본이나 미국 등 디지털 강국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진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내는 능력이 실로 놀라웠다.
그렇게 오후 4시를 넘어서자 행사장은 서서히 갈무리하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방문객의 발길이 뜸해지는 모습을 보니, 이번 출장의 핵심 목표였던 파트너십 구축은 이대로 물 건너가는 것 같아 짙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공식 일정이 끝날 무렵, 평소 친분이 있던 한국 참가사 대표님 한 분이 우리 부스를 찾아왔다. 본인은 일찌감치 미팅을 마쳤다며 가벼운 수다를 떨러 들른 참이었는데, 그 여유로운 방문이 오히려 묘한 위로가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표님이 문득 물었다. “여기 방콕에서 그래픽 에이전시 크게 하는 회사 있는데, 혹시 만나봤어요?”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답하자, 그는 아마 아직 근처에 있을 거라며 즉석에서 연락을 취해 우리를 연결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회사의 대표가 행사장을 찾아왔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그들은 태국을 거점으로 코카콜라, 디즈니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그래픽 작업을 전담하는 대형 에이전시였다. 예상보다 훨씬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마주하니 놀라움을 넘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찰나, 강렬한 확신이 스쳤다. 이들과 손을 잡는다면 분명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았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그에게 즉흥적인 제휴를 제안했다. 정식 미팅 테이블도 아닌 스탠딩 토크 중에 불쑥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내게 체면보다 중요한 건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하지만 진심을 담아 용기를 냈다.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던 차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 그는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OK krap(오케이 캅)."
*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주 연재는 '수요일'에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편, '태국 방콕 : 찰나의 순간을 절호의 기회로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