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0
뭐지 이 친구는
일하기가 싫은건가
일본은 전통과 절차를 지독하리만치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다. 이러한 경향은 기업 문화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개인보다는 조직을, 변화보다는 질서와 조화를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물론 이런 문화가 모든 세대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 느끼는 이들도 많고, 특히 속도감이 생명인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이러한 전통적 방식이 종종 성장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일본 기업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핵심 키워드가 바로 ‘네마와시(根回し)’다. 본래 나무를 옮겨 심기 전, 뿌리(根) 주변을 미리 정리해(回し) 새로운 땅에서 잘 자라도록 돕는 원예 용어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오늘날 일본 사회, 특히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네마와시는 공식적인 결정이 내려지기 전, 관계자들의 의견을 미리 두루 조율하는 과정을 뜻한다. 하위 실무자부터 최고 결정권자까지, 관계된 모든 부서와 이해관계자가 거미줄처럼 얽혀 합의점을 찾아가는 식이다. 과정이 워낙 길고 복잡해 결정은 한없이 느려지기 마련이지만, 일단 결론이 나면 실행만큼은 일사불란하다. 이미 모든 이의 동의를 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패의 책임이 개인에게 쏠리지 않고 조직 전체로 분산된다는 점에서, 지극히 안정적인 시스템이기도 하다.
2019년 6월, 나는 베트남 호치민과 태국 방콕을 거쳐 2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마지막 목적지,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일본식 업무 문화의 정수, '네마와시'의 실체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참 요상한 루트였다. 방콕 수완나폼 공항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도쿄로 가기 위해 일단 인천으로 향해야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 조건상 항공권의 기점과 종점이 반드시 한국이어야 했기에 생긴 제약이었다. 지원금이라는 실리를 챙기기 위해 우리는 몸이 고생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 일정이었다. 내가 발표자로 참석해야 하는 KOTRA 주관의 ‘Korea IT Expo Japan 2019’가 바로 다음 날로 다가와 있었다. 방콕에서 한국에 입국했다가 다시 짐을 싸서 일본으로 가는 것은 시간 낭비가 너무 컸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인천공항은 잠시 ‘스치는’ 경유지로 활용하고, 환승 게이트를 거쳐 곧바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밟은 인천공항의 공기는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었다. 한국 유심으로 교체한 뒤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짧은 안부를 나눴다. 목소리를 들으니 긴장이 잠시 풀리는 듯했지만, 마음을 놓을 여유는 없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다시 게이트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2주간 이어진 3개국 출장의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신주쿠 시내에 도착하니 어느덧 깊은 밤이었다. 연이은 비행과 환승으로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방콕에서 다 나은 줄 알았던 친구의 장염까지 다시 도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만신창이 형제였다. 우리는 숙소 근처 야키토리 집에서 가볍게 허기만 달랜 뒤, 서로 말 한마디 섞을 기운조차 없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묵직한 몸을 이끌고 출근길 인파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Korea IT Expo Japan 2019’가 열리는 도쿄 뉴 오타니 호텔. 이번 행사 역시 방콕과 마찬가지로 호텔 내 대형 컨퍼런스 홀을 통째로 빌려 진행되는 대규모 일정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예상치 못한 압도적 규모였다. 일본의 호텔은 대개 작고 아기자기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뉴 오타니 호텔은 입구부터 그 짐작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고 보니 이곳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건립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명문 호텔이었다.
특히 뉴 오타니 호텔의 ‘가든 타워동’에 자리 잡은 일본식 정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점심시간, 주최 측에서 나눠준 도시락을 비우고 소화를 시킬 겸 정원 산책에 나섰는데, 관리에 쏟은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나무와 인공 연못, 돌다리와 정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의 테라스 공간을 활용해 조성한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상당해, 정해진 루트를 한 바퀴 도는 데만 꼬박 20분 가까이 걸렸다. ‘정원에 진심인 나라’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내고서라도 일부러 찾아올 만한, 그야말로 수준 높은 명작이었다.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부스 상태를 점검하고, 배정된 통역사와 짧은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나는 통역사에게 이번 출장의 핵심 목표를 분명히 전달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발굴하고 실질적인 관계를 맺는 게 최우선입니다.”
내 말을 들은 통역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곤란하다는 듯 난색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미적지근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순간 베트남에서 함께했던 열정 가득한 통역사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이 친구, 일하기가 싫은 건가? 지금이라도 교체를 요청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는 미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미팅 자체는 매우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적인 ‘소프트 파워’ 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정부와 대기업, 특히 통신사들이 5G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신규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었고, 시장에는 말 그대로 돈이 활발하게 돌고 있었다. 모두가 그 흐름을 타기 위해 비즈니스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활기찬 시점이었다.
순조로운 대화 흐름에 힘입어 나 역시 기대감을 높여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자연스럽게 제휴 제안을 건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안이 나오는 순간마다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꽤 직급이 있는 담당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막상 구체적인 협력 단계로 넘어가려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유는 명확했다. 본인이 현장에서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 상급자에게 정식 보고를 한 뒤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일본식 ‘네마와시’가 작동하는 현장이었다. 즉석에서 결단을 내리기보다는 조직 내 여러 단계를 거치며 합의를 쌓아가는 방식. 이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공식적인 승인이 떨어지는 구조였다. 처음 통역사가 보였던 회의적인 반응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 쓰읍.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업무 처리 속도만큼은 자부하던 나였기에, 일본 특유의 이 느릿한 템포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낯설고 답답했다.
다음편, '일본 도쿄 :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