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2
Gonna be, gonna be
Golden Gai
반나절의 짧지만 달콤했던 힐링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신주쿠의 숙소로 복귀했다. 방을 지키고 있던 친구에게 안부를 묻자, 컨디션이 제법 회복되어 우에노 동물원까지 다녀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아침보다 안색에 생기가 돌고 표정도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그제야 나도 비로소 마음 편히 저녁 일정을 준비할 수 있었다.
어느덧 약속한 저녁 시간, 미리 연락해 둔 일본 파트너사 담당자를 맞이하기 위해 로비로 향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 그레이서리 신주쿠'는 로비 옆 테라스에 설치된 거대한 고질라 머리 조형물 덕분에 신주쿠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곳이다.
마침 정해진 시각이 되자 고질라가 거대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조명과 함께 입에서 불빛이 번쩍거리는 고질라 특유의 퍼포먼스가 펼쳐졌고, 나는 그 흥미로운 광경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타이밍에 맞춰 파트너사 담당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종일 포카리스웨트로 연명했던 친구를 고려해, 자극적인 요리보다는 속을 편안하고 든든하게 채워줄 백반 식당을 찾기로 했다. 일본 파트너사 담당자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츠루카메 식당(つるかめ食堂)'. 쇼와 시대인 195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유구한 내력을 지닌 노포였다.
나는 연어구이 정식을 주문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연어의 고소한 향이 입안에 침을 고이게 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과 따끈한 미소시루(된장국)가 곁들여졌다. 추가로 주문한 고기조림 역시 화려하진 않았지만, 일본 가정식 특유의 정갈하고 깊은 맛이 배어 있었다.
사실 신주쿠 가부키초 일대는 화려한 유흥가로 악명 높아, 술집이 아닌 제대로 된 ‘밥집’을 찾기가 의외로 힘들다. 그 번잡한 거리 한복판에서 이토록 소박하고 정직한 맛을 고수하는 식당을 만난 건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녀의 세심한 안내 덕분에 신주쿠의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 숨겨진, 따뜻하고 소박한 이면을 발견한 셈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 현지 사정에 밝은 그녀가 있는 김에 '골든가이(新宿ゴールデン街)'를 둘러보기로 했다. 골든가이는 태평양 전쟁 직후 암시장이 형성되며 자연스레 생겨난 거리다. 1950년대 한때 홍등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좁고 긴 골목마다 약 200여 개의 작은 선술집들이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가게마다 크기는 손바닥만 해서 대여섯 명만 들어차도 금세 만석이 된다. 하지만 그 비좁은 공간이 주는 특별한 친밀감이 있다. 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인과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고, 옆자리의 낯선 이와도 술 한 잔을 매개로 금세 친구가 되는 곳. 그것이 바로 골든가이만이 가진 투박한 매력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버블 경제 이전, 60~70년대 일본의 정취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빛바랜 간판과 낡은 목조 건물, 그 위를 수놓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뒤섞여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에 젖게 했다.
우리는 수많은 가게 사이를 한참 헤매다 분위기가 유독 아늑해 보이는 작은 바 하나를 골라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니혼슈를 주문하고, 긴장이 탁 풀리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간 못다 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전날 미팅에서 느꼈던 일본식 '네마와시(根回し)' 문화의 답답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양국의 직장 문화를 모두 겪어본 그녀는 내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일본식 조직 문화의 비효율성에 대해 나보다 더 생생하고 뼈아픈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서로의 경험이 공명하며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술잔이 비워질수록 우리의 웃음소리도 골목의 소음 속으로 기분 좋게 녹아들었다.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비울 수 있는 상대와 마주 앉아 있으니, 마음 한편에 응어리졌던 피로와 조급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 밤, 골든가이의 공기에는 묘한 위로와 여유가 서려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예외 없이 찾아온 숙취를 이끌고 '또' 이치란 라멘을 찾았다. 뜨거운 국물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서둘러 짐을 싸 공항으로 향했다.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 창밖을 내다보니, 베트남과 태국을 거쳐 일본에 이르기까지 2주간 3개국을 숨 가쁘게 달렸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듬주, 도쿄에서 만났던 업체 중 하나인 '미치스(MISHISUU)'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전시회 직후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냈던 안부 메일에 대한 답장이었다. 내용은 놀라웠다. 내부 협의가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우리와 정식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가 명확히 담겨 있었다. 솔직히 일본은 이번에 '꽝'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에, 그 소식은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다가왔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의 진행 속도였다. 물리적 거리 탓에 모든 절차를 이메일과 서면으로 진행했는데, '중요한 협약을 이렇게까지 간결하게 처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힘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네마와시’의 진면목이었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지독하리만치 신중하지만, 일단 합의가 이루어지면 실행은 놀라울 만큼 신속하고 체계적이었다.
서면 협약을 마친 지 약 3개월 후, 미치스의 대표인 미나미 상이 직접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반갑게 얼굴을 맞댄 우리는 양국의 시장 상황과 산업 동향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신뢰를 쌓았다. 이로써 우리의 글로벌 네트워크에는 든든한 파트너가 한 곳 더 추가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소중한 관계의 시작은, 막막한 마음을 다잡으며 나카메구로의 카페에서 보냈던 그 한 통의 메일이었다. 당장 반응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했더라면, 이 인연은 결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스페인의 명언이 하나 있었다.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마라(Sin prisa pero sin pausa)."
2주간의 숨 가쁜 3개국 투어는 이렇게 모든 파트너십을 성공적으로 매듭지으며 막을 내렸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맘모식스는 우리의 기술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널리 활용될 수 있다는 비즈니스 논리를 증명해 냈고, 그해 겨울 당당히 TIPS 프로그램에 최종 선발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성취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새로운 기회를 향해 짐을 꾸렸다. 이번 목적지는 반년 만에 다시 찾는 유럽이다. 나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음편, '독일 쾰른 : 딱 반 발짝씩 남들보다 빠르게 1'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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