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쾰른 : 딱 반 발짝씩 남들보다 빠르게 2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4

by chill십구년생guy


다시만난 게임스컴
변함없는 음주가무



고속열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열차는 어느새 쾰른 중앙역(Köln Hauptbahnhof) 플랫폼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기차에서 내려 발을 내딛는 순간, 역 맞은편에 우뚝 솟은 쾰른 대성당의 거대한 자태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내가 다시 쾰른에 왔구나.’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어도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비주얼



숙소는 작년과 같은 곳으로 정했다. 게임스컴이 열리는 쾰른 메세(Koelnmesse) 인근의 ‘이비스 버젯(ibis budget)’ 호텔이다. 사실 이곳은 안락함이나 쾌적한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행사장까지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는 압도적인 장점 하나만으로 다시 선택할 이유는 충분했다. 매일 무거운 장비들을 들고 전쟁터 같은 전시장으로 출퇴근해야 하는 우리에게, 안락함보다는 1분이라도 아낄 수 있는 ‘실용성’이 훨씬 절실했기 때문이다. 효율을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 이 또한 출장의 묘미라면 묘미였다.



사전 점검은 필수



숙소에 짐을 풀기 무섭게 곧장 전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막바지 설치 작업이 한창인 한국 공동관 내부는 망치 소리와 분주한 발걸음으로 어수선한 열기가 가득했다. 나는 숨 돌릴 틈 없이 우리 부스의 상태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하기 시작했다.


전시 사전 점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홍보물의 인쇄 상태다. 사소한 오타나 미묘한 색감의 차이가 브랜드의 첫인상을 결정짓기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음은 실제 시연 공간의 확보 여부였다. 장비를 설치하고 나면 예상보다 동선이 좁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관람객이 한꺼번에 몰려들 때를 대비해, 체험자가 불편함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반경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콘센트의 개수와 위치를 살폈다. 모든 장비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려면 안정적인 전원 공급이 필수였다. 도면상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현장의 돌발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머릿속 체크리스트에 하나씩 확인 표시를 해나가며 부스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비로소 세계 최대 게임쇼의 막이 오르고 있다는 생생한 실감이 전율처럼 다가왔다.



마시지 않을수 없다



익숙한 손길로 부스 점검을 마무리한 뒤, 지체 없이 트램에 올라 올드마켓 광장으로 향했다. 올해는 운 좋게도 친한 국내 업체가 게임스컴에 함께 참가하게 되어, 그들이 저녁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년 만에 다시 발을 들인 ‘브라우하우스 시온(Brauhaus Sion)’. 테라스석에 자리를 잡자마자 특유의 고소한 맥주 향과 사람들의 활기찬 웅성거림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우리를 반겼다. 쾰른의 자부심인 쾰쉬(Kölsch) 맥주는 여전히 환상적이었다. 가볍고 시원한 목넘김 뒤에 찾아오는 은근한 쌉쌀함과 개운한 뒷맛은 이 도시의 공기와 찰떡처럼 어우러졌다.



쾰른 브라우하우스의 맛없없 한 상



이미 ‘검증을 마친’ 곳이기에 자연스레 단골의 여유가 묻어났다. 마치 내가 이 식당의 주인이라도 된 양 자신 있게 메뉴판을 넘기며 동료들에게 이것저것 추천을 건넸다. “이건 꼭 드셔보셔야 합니다”라며 호기롭게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로 속속 도착했다. 함께한 대표님과 이사님은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만족해했다. 내가 직접 만든 음식도 아닌데, 그들의 호평에 괜히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문득 여행과 출장의 경계가 기분 좋게 희미해졌다. 분명 치열한 비즈니스를 위해 온 길이었지만,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반가운 이들과 마음껏 웃으며 맥주잔을 부딪히는 이 순간만큼은 그저 완벽하게 즐거운 저녁이었다.



야밤의 라이딩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진 거리 풍경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골목마다 정렬해 있는 수많은 전동 킥보드들이었다. 독일이 불과 두 달 전, 도로교통법을 개정해 전동 킥보드의 도로 주행을 공식 허용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막 공유 서비스 시장의 빗장이 풀린 듯, 여러 스타트업이 앞다투어 영토 확장에 나선 활기찬 모습이었다.


당시 한국의 공유 킥보드 서비스는 걸음마 단계였다. 강남 등 서울 일부 지역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고, 이용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쾰른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들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킥보드를 타고 도심을 가로질렀다.



작년과 달리 도시 곳곳에 전동 킥보드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눈앞에 놓인 킥보드 한 대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앱을 내려받았다. 가입 절차를 마치자 ‘삑’ 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 첫 해외 공유 킥보드 라이딩이 시작되었다.


쾰른의 밤거리는 고요했고, 스치는 바람은 기분 좋게 서늘했다. 맥주 기운이 살짝 감도는 상태에서 타는 킥보드는 묘하게 짜릿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마음 한편으론 '이래도 되나' 싶은 알싸한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감출 수 없었다. 금세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가속 레버를 당기며 호텔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전시 준비의 팽팽한 긴장감도, 머나먼 여정의 피로도 그 바람 속에 모두 흩날려 보내는 순간이었다.



게임스컴 2019



다음 날 아침, 마침내 게임스컴의 거대한 막이 올랐다. 행사장은 문을 열자마자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인파로 가득 찼고, 수십 개의 언어가 뒤섞인 공기는 강렬한 활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전 내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미팅과 시연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낯선 바이어들과의 대화는 늘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세계적인 무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속엔 벅찬 고양감이 차올랐다.


오후가 되자 잠시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친구에게 잠시 부스를 맡기고 본격적인 전시장 탐방에 나섰다. 역시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쇼답게 전시장 어디를 가나 발 디딜 틈 없는 인산인해였다. 거대한 LED 스크린에서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최신 게임 트레일러가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인기 부스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 역시 새로 공개된 타이틀을 직접 체험해 보고 화려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시나마 순수한 ‘게이머 모드’로 돌아가 이 축제를 만끽했다.


올해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넷플릭스의 게임 시장 진출과 구글이 야심 차게 선보인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 ‘스테디아(Stadia)’였다. 당시 전 세계적인 5G 상용화 흐름 속에서 ‘스트리밍 기업의 게임 진출’과 ‘게임 기업의 스트리밍 진출’이 맞물리는 지점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콘텐츠 소비 방식의 거대한 대전환을 예고하는 서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타공인 비즈니스 트렌드에 민감한 ‘트민남’으로서 이 흥미로운 현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우선은 현장의 뜨거운 에너지에 몸을 맡긴 채 구경에 몰입했다.


낮에는 치열한 비즈니스의 장으로, 밤에는 흥겨운 축제의 장으로 변하는 정신없는 나날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도시의 밤은 늘 들뜬 공기로 가득했고, 우리는 매일 밤 맥주잔을 부딪치며 “오늘도 수고했다”는 말로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취기와 열기 속에 도취해 있는 사이, 어느덧 전시회의 마지막 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다음편, '독일 쾰른 : 딱 반 발짝씩 남들보다 빠르게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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