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5
느려선 안되지만 빨라도 위험한
딱 반 발짝의 속도
게임스컴 2019의 마지막 날 아침,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전시가 끝난다는 아쉬움보다는, 오늘 예정된 특별한 이벤트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바로 영국의 XR 광고 미디어 스타트업 ‘ADMIX’와 공식적인 업무 협약(MOU)을 체결하는 날이었다.
오전에 잡힌 미팅들을 차분히 마무리했다. 전시 마지막 날 특유의 홀가분함 덕분인지, 오가는 인사와 대화 속에는 한결 여유로운 정취가 묻어났다. 그리고 약속된 오후, 드디어 ADMIX의 부사장 케빈(Kevin)과 마주 앉았다. 1년 만의 재회이자 그간 이메일로만 긴밀히 소통해 왔던 터라, 비즈니스 파트너 이상의 반가움이 앞섰다.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XR 광고 시장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했다. 케빈은 현재 개발 중인 광고 솔루션의 가능성과 비전을 가감 없이 설명했고, 나는 한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시장의 급격한 온라인 전환 트렌드, 그리고 우리가 고심하던 비즈니스 모델의 돌파구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서로의 결핍과 강점이 맞물리는 지점을 확인하자, "함께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이어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마련한 공식 스테이지에서 MOU 체결식이 진행되었다. 참관객들의 박수 속에 케빈과 우리 대표인 친구가 나란히 서서 협약서에 서명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그 의미 있는 순간을 지켜보며, 나는 이 협약이 가져올 구체적인 기회와 실행 전략들을 머릿속에 바쁘게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친 뒤, 부스를 정리하고 짐을 챙겨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사실 전시 마지막 날은 폐장 시각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 업계의 암묵적인 룰이기도 하다. 주요 바이어와 관계자들은 이미 초반에 미팅을 마무리하기에, 셋째 날 이후는 성과를 회고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미련 없이 짐을 꾸렸다.
호텔에 무거운 장비들을 내려두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번 게임스컴에 함께 참가한 한국 업체 동료들과 마지막 회포를 풀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목적지는 쾰른 중심가에 자리한 한식당. 한쪽 벽에 큼직하게 붙은 ‘삼겹살 무한리필’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며칠간 빵과 감자, 소시지로 연명하며 기름졌던 속이 벌써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불판 위에 삼겹살이 올라가고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지쳐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도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상추에 싸서 입에 넣는 순간, “아,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여기에 구수한 된장찌개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쾰른의 자부심인 ‘시온 쾰쉬(Sion Kölsch)’에 ‘참이슬’을 섞어, 진정한 동서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소맥을 제조해 잔을 부딪쳤다.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시장에서 겪은 무용담과 아찔했던 실수담이 안주가 되어 쌓여가며, 쾰른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뜨겁게 익어갔다.
돌아오는 길, 동료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어김없이 공유 킥보드에 올랐다. 며칠 사이 손에 익어버린 익숙한 루틴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돌이켜보면 그것은 명백한 음주운전이었다. 맥주와 소맥의 기분 좋은 여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만큼 나의 판단력과 반사 신경은 무뎌져 있었다.
쾰른의 밤거리를 가르며 호텔로 향하던 중,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트램 건널목을 지나던 찰나, 철길 사이의 깊은 틈새에 킥보드 바퀴가 덜컥하고 걸려버린 것이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중심을 잃은 찰나, 멀리서 트램의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발을 굴러 킥보드를 질질 끌다시피 밀어내며 간신히 궤도 밖으로 몸을 던졌다. 불과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찰나였지만, 머릿속은 새하얀 정지 화면이 되었다.
육중한 트램이 굉음을 내며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손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과 터질 듯한 심장 박동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이건 진짜 위험했다.’ 그제야 비로소 차가운 현실감이 뒤통수를 때렸다. 그 아찔한 경험은 취기를 단숨에 날려버릴 만큼 강렬했다. 이후로는 두 번 다시 킥보드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동이 필요할 땐 얌전히 트램을 기다리거나 우버를 호출했다.
다음 날 아침, 긴 여정의 여운을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독일의 풍경 위로, 이번 출장의 수많은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도 공유 킥보드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열풍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면허 운전과 난폭 주행, 헬멧 미착용 등 안전 문제가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랐고, 길거리 곳곳에 무분별하게 방치된 기기들은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규제의 칼날이 매서워지고 관리 부실 문제가 겹치면서 사업의 수익성은 곤두박질쳤다. 시장은 어느덧 성장보다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공유 킥보드 서비스는 ‘안전성’이라는 비즈니스의 본질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크게 발을 내디딘 격이었다. 게임스컴에서 목격했던 넷플릭스의 게임 시장 진출이나 구글의 ‘스테디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5G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만 함몰되어 성급하게 출사표를 던진 탓에, 현재는 모두 뼈아픈 실패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반면, ADMIX와 손잡고 뛰어든 XR 광고 분야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기회를 열어주었다. 당시 XR 시장은 기술적 화려함에 비해 뚜렷한 수익 모델이 부재한 상태였다. 대부분 오프라인 중심의 B2B 비즈니스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ADMIX와의 협력을 통해 B2C 시장에서도 XR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입증해 냈다.
이러한 시도는 훗날 맘모식스의 핵심 프로젝트인 ‘갤럭시티 어스(Galaxity Earth)’를 추진할 때 강력한 사업성 근거가 되었고, 마침내 회사를 성공적으로 엑싯(Exit)시키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비록 당시에는 앞서가는 파트너사의 뒤를 쫓는 처지였지만, 그들의 도전을 곁에서 함께 검증하며 민첩하게 움직인 덕분에 우리는 경쟁자들보다 ‘딱 반 발짝’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가 결국 비즈니스의 명운을 갈랐다.
스타트업의 속도란 무조건 빠르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배웠다. 시장보다 너무 뒤처져서도 안 되지만, 시장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너무 앞서가서도 안 된다. “딱 반 발짝.” 그것이 우리가 체득한 최적의 속도였다. 이 교훈은 훗날 ‘메타버스’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분야에서 우리가 가장 준비된 기업으로 평가받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우리의 도전이 쌓아 올린 명성의 초석은, 이어지는 다음 여정에서 더욱 단단하게 다져지게 된다.
다음편, '태국 방콕 : 여기에 있는게 맞나 싶지만서도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