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6
네가 직접 그 자리에 있어봐
차마 그런 말이 안 나온다
“고기도 큰물에서 노는 놈이 크다”는 속담이 있다. 뛰어난 환경에서 보고 배우며 경험을 쌓아야만 비로소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교육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경험은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할 수 있는 영역이다. 직접 큰물에 몸을 던져 파도를 타본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지고, 그 시야의 확장만큼 품는 포부의 크기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이 개념이 변질되어 오직 과시에만 함몰된 ‘인스타 허세’나 ‘카푸어’ 같은 부작용이 속출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외형적인 이미지와 신뢰가 생존과 직결되는 스타트업에게, 익숙한 리그를 벗어나 더 큰 무대에 서려는 도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대외적인 브랜드 평판은 때로 기술력이나 당장의 매출보다 더 강력한 무형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2019년 9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한-태 4차 산업혁명 쇼케이스’에 참석하며 이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맘모식스’라는 이름에 실리는 무게감은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의 브랜드 가치가 그 행사 전과 후로 극명하게 나뉠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그 경험은 단순한 행사 참여를 넘어, 우리 스스로를 큰물로 밀어 넣으며 체급을 키운 결정적 성장의 기회였다.
연말 TIPS 재도전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안고 정신없이 달리던 어느 날, KOTRA에서 발행한 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한-태 4차 산업혁명 쇼케이스’에 참가할 스타트업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해외 파트너십 확장에 목말라 있던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채워 내려갔다. 솔직히 말하면, 행사의 세부 격식이나 참석자들의 면면을 치밀하게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그저 우리를 해외 시장에 알릴 수 있는 ‘괜찮은 기회’ 정도로만 가볍게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얼마 뒤 도착한 안내 메일 한 통이 공기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참가사 선정 통보와 함께 전달된 드레스 코드는 ‘정장 권장, 최소 비즈니스 캐주얼’이었다.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어 행사 개요를 다시금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곧 전율이 일었다. 이 쇼케이스는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당시 대통령의 태국 순방 일정에 맞춰 기획된 공식 국가 행사였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대한민국 대표 대기업들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그야말로 ‘별들의 무대’였던 것이다.
그제야 상황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작은 스타트업인 우리가 감히 그런 엄중한 자리에 서도 되는 것인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마주하고 우리의 존재감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시연용 장비와 카탈로그를 챙기고, 평소엔 입을 일 없던 정장 한 벌을 조심스레 캐리어에 넣었다. 그렇게 방콕행 오전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출장이 아닌 우리를 더 큰 세상으로 안내할 도전의 시작임을 직감했다.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익숙한 통로(Thonglo) 지역으로 향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숨을 고르려던 찰나, 함께 온 친구는 정장으로 갈아입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날 저녁은 각 기업 대표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만찬을 겸해 만나는 사전 간담회 자리였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는 친구의 표정에는 ‘오늘만큼은 사소한 실수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비장한 각오로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고, 나는 모처럼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BTS 지상철을 타고 아속(Asok)역으로 향하는 길, 문득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북한 식당이 떠올랐다. 얼마 전 출장길에 맛보았던 그곳의 냉면이 꽤 인상 깊었던 터라, 방콕에 온 김에 그 맛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평양냉면과 지지미를 주문했다.
이곳의 냉면은 과거 두바이 옥류관에서 경험했던 맛과 비슷했다. 흔히 한국에서 기대하는 ‘슴슴하고 깊은 맛’의 평양냉면이 아니라, 매콤하고 새콤한 양념이 가미된 자극적이고 쫀득한 면발이었다. ‘내가 아는 평양냉면은 이런 맛이 아닐 텐데’라는 의구심과 ‘그런데 이게 또 묘하게 맛있네’라는 수긍이 공존하는 개성 넘치는 맛이었다. 이렇듯 익숙한 이름 뒤에 숨겨진 낯선 변주는 여행이 주는 뜻밖의 묘미다.
식사 도중 냉장고 한편에서 생소한 술병이 눈에 띄었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도토리로 빚은 25도짜리 북한소주라고 했다. ‘도토리가 이렇게 진지한 도수를 품을 수 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독주를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어 기념품 삼아 한 병을 챙겨 숙소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처가 어르신들과 함께 맛본 그 ‘도토리 소주’는 우리가 흔히 마시는 소주와는 궤가 확실히 달랐다. 오히려 풋내 나는 보드카나 정성껏 내린 담금주에 가까운 풍미였다. 뜨끈한 국물 요리에 곁들이면 “이 술 참 독특하고 좋다”는 소리가 나올 법한, 투박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힘이 있는 술이었다.
방콕에서의 첫 저녁 식사를 마치고 통로 숙소로 돌아오니, 마침 만찬을 마친 친구도 복귀해 있었다. 팽팽했던 정장을 벗어 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와 함께, 우리는 자연스럽게 에까마이(Ekkamai) 근처의 펍으로 발길을 옮겼다. 눅진한 밤공기 사이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회포를 풀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친구는 조금 전 만찬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꺼내 놓았다. 사진 속 행사장은 화려함 그 자체였고, 테이블을 채운 이들의 면면은 실로 대단했다. 정부 부처 장관부터 대기업 임원들까지, 이름만 들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고위 관계자들이 즐비했다. 친구는 특히 정부 대변인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처음엔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예상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해 놀랐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긴장감만큼은 마지막까지 떨쳐낼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거물들 옆에 앉은 김에 우리 회사 좀 잘 봐달라고 넌지시라도 말해보지 그랬냐”며 장난 섞인 핀잔을 주었다. 친구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네가 직접 그 자리에 앉아봐.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니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말 한마디는 물론, 앉아 있는 자세조차 의식해야 하는 자리의 무게를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었을까.
맥주잔을 기울이며 친구의 무용담을 듣다 보니, 공항을 떠나며 품었던 의구심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정말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걸까?’ 아직 제대로 된 성과도 내지 못한 작은 스타트업이 국가적 행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플랫폼 위에 올려졌다. 이제는 물러서거나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 거대한 경험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수밖에.
내일은 마침내 대통령과 태국 총리가 나란히 참석하는 공식 행사가 열린다. 맘모식스의 기술력을 직접 선보여야 하는 운명의 날이다. 팽팽한 긴장감과 묘한 설렘,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채 그렇게 방콕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갔다.
다음편, '태국 방콕 : 여기에 있는게 맞나 싶지만서도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