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 여기에 있는게 맞나 싶지만서도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8

by chill십구년생guy


뭐, 까짓거
해보면 되지



다음 날 아침, 전날 밤의 여흥이 몸 어딘가에 묵직한 여운으로 남아 있었지만 기분 좋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방콕에 오기 전부터 들르기로 마음먹었던 곳, 과거 우리와 MOU를 체결했던 현지 파트너사 ‘이미지맥스(Imagimax)’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날이다.


당시 협약서를 주고받으며 “조만간 꼭 다시 돌아와 사무실로 찾아뵙고, 한 수 배우겠습니다”라고 건넸던 인사가 떠올랐다. 그저 지나가는 빈말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러 가는 길이라는 생각에 은근한 설렘이 앞섰다. 세상 일의 절반은 말만 앞세우다 흐지부지되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드물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중이라 그런지 발걸음이 꽤 가벼웠다.



생각보다 큰 회사 규모에 내심 놀랐다



그랩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이미지맥스의 사무실은 입구부터 기대 이상이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마감된 널찍한 공간 곳곳에 싱그러운 초록 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세련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첫인상만으로도 ‘확실히 감각 있는 곳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표님과 반갑게 재회한 뒤 안내를 받아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회사의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주로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클라이언트들의 그래픽 외주나 후반 작업을 수행한다고 했는데, 실제 업무 현장과 직원들의 숙련도를 보니 “이건 진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엔진이구나” 싶었다. 단순히 겉모습만 화려한 곳이 아니라, 내실이 탄탄하게 다져진 기업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태국의 경쟁력 있는 인프라를 활용한 사업 구상을 꺼내 놓았다. 그러자 대표님은 기다렸다는 듯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 저희와 함께하시면 됩니다”라며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하던 중, 그쪽에서 먼저 우리의 기술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


문제는 오늘 내가 완벽히 무방비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번 방문은 어디까지나 쇼케이스 일정 중 가볍게 안부를 전하려던 목적이 컸기에, 시연용 데모 기기나 발표 자료를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특히 ‘경험’이 본질인 VR 기술을 말로만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명확했다. 나 역시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뭐 먹고 싶어? 라는 질문에 로컬 푸드라고 답한 결과는 대만족



다행히 다음 달 초에 다시 태국을 방문할 일정이 있어, 그때 정식으로 시연을 선보이기로 약속했다. 대표님도 기분 좋게 응해주며 “일단 오늘은 맛있는 식사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점심을 함께하며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고,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긴 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술쟁이의 행복



저녁에는 방콕에 거주 중인 친구의 지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다. 친구가 한국외대 태국어과 출신이라 그런지, 방콕에만 오면 인맥의 화수분이 터진 듯 아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지인은 동료들까지 동반해 나왔고, 우리 일행은 왁자지껄한 저녁 식사 후 그들이 추천한 로컬 재즈바로 자리를 옮겼다. 라이브 연주가 은근하게 흐르는 공간에서 술잔을 기울이니, 비로소 현지의 정취에 흠뻑 젖어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 태국의 로컬 브랜디인 ‘리젠시(Regency)’를 처음 추천받았다. 잔을 채우고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일 향이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었다. 사실 태국 술이라고 해서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매력적인 풍미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술에 담긴 창업주의 고집스러운 프라이드였다. 면세점이나 백화점, 대형 쇼핑몰 같은 화려한 유통 채널에는 절대 물건을 대지 않는단다. 오직 동네 슈퍼나 리쿼샵, 편의점 같은 서민들의 생활권에서만 판매한다는 철학을 듣고 나니, 이 술이 한층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속 주변엔 좀처럼 없고, 온눗 정도까지 내려오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



리젠시는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탄산수를 섞어 하이볼로 즐기는 것이 정석이다. 그날 이후 리젠시는 내 전용 술장에 반드시 구비해 두어야 하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었고, 술이 떨어져 갈 때쯤이면 자연스레 태국행 비행기표를 뒤적이게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과 술,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로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매듭지었다. 다음 날은 느지막이 일어나 체크아웃을 마친 뒤, 근처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마지막으로 태국식 마사지로 여정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고 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떠나는 발걸음은 언제나 아쉽지만, ‘조만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마음만은 더없이 홀가분했다.






후일담



‘한-태 4차 산업혁명 쇼케이스’는 내게 무척이나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작은 스타트업이 국가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양국 정상과 한 공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얼떨떨하면서도 묘한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해당 행사는 국내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졌고, 덕분에 우리는 기사 속에서 삼성전자와 나란히 언급되는 과분한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나란히 언급되다니 이거 영광이올시다



냉정히 따져보면 이 행사가 곧장 거대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지거나 가시적인 매출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내 내면의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어떤 거창한 비즈니스 자리에서도 기죽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흔히 교만은 경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스타트업에게 ‘당당함’은 때로 치명적인 생존 기술이 된다. 중요한 협상 테이블에서 분위기에 압도되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면 늘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표현하자면, 기분 좋게 ‘간이 커진’ 상태가 된 셈이다.


이 커진 간(?)은 이후 수많은 실전 무대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굵직한 딜을 연달아 성사시키고, 훗날 엑싯(Exit)이라는 커다란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던 바탕에는 늘 이 당당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추진했던 캠퍼스 메타버스 프로젝트 때도 마찬가지였다. 맘모식스는 신한은행, LG유플러스, 숙명여대 같은 거대 파트너들 사이에서도 한 축을 든든히 지켜냈다. 남들이 보기엔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자리였겠지만, 우리는 “뭐, 까짓거 한번 해보지”라는 배짱으로 정면 돌파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단단해진 우리를 발견하는 순간들이었다.


이 뜨거웠던 경험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불과 한 달 뒤, 나는 다시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방콕이 아닌 북부의 고도(古都), 치앙마이였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훗날 태국 지사 설립을 결심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내 비즈니스 인생에 ‘결정적인 한 방’이 된다.




다음편, '태국 치앙마이 : 디지털 노마드도 아무렴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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