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마이 : 디지털 노마드도 아무렴 1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9

by chill십구년생guy


지식으로만 존재하던 평행세계
디지털 노마드란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가 한창 유행처럼 번질 때가 있었다. 디지털(digital)과 유목민(nomad)의 합성어. 노트북 한 대와 스마트폰, 그리고 끊기지 않는 와이파이만 있다면 지구 반대편 어디서든 월급값을 할 수 있는 인종들을 뜻한다. 출퇴근 전쟁도 없고, 고정된 사무실도 없다. 전 세계를 내 집 거실처럼 떠돌며 일하다가, 지치면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해 질 무렵엔 수영장 옆에서 폼나게 노트북을 덮는 삶. 그야말로 현대인이 꿈꾸는 낭만의 결정체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그 삶은 늘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평행세계’였다. 나는 소위 말하는 ‘꼰대’, 즉 옛날 사람이다. 나름대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 애쓰고 고정관념을 깨부수려 노력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20년 넘는 사회생활이 내 몸에 새긴 문법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일은 모름지기 정해진 시간에 사무실로 출근해서, 동료들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치열하게 부대껴야 돌아간다는 믿음.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를 들으면 동경과 함께 본능적인 거부감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일이 제대로 되겠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겨우 체면을 차리며 삼키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디지털 노마드에게 공항이란? 그저 무료 와이파이존 일뿐



그런 나의 단단한 편견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2019년 10월, 치앙마이를 다녀오면서부터다. 정확히 말하면 치앙마이라는 도시 그 자체보다, 그곳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눈빛'을 직접 목격한 이후였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정답이라 믿어온 삶의 방식보다, 이들의 유연함이 미래의 더 강력한 표준이 될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이 처음으로 들었다.



대구에서 치앙마이까지



당시 맘모식스는 수도권에서 대구로 본사를 옮긴 직후였다.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지역 기관들이 추진하는 사업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솔직히 말해, 지역 사회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0%였다면 거짓말이다. 여하튼 그 진심 어린(?) 노력 덕분인지, 우리가 주력하던 해외 제휴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지원하는 ‘글로벌 엑셀러레이터 캠퍼스’ 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 태국행 티켓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일정은 명확했다. 태국 북부의 보물이라 불리는 치앙마이의 엑셀러레이터 ‘Startup Thailand’ 보육 공간을 방문해 현지 비즈니스 환경을 살피고, 방콕으로 넘어가 ‘이노베이션 타일랜드 엑스포 2019’에 참가하는 것. 방콕은 그해에만 벌써 세 번째라 큰 감흥이 없었지만, 치앙마이는 처음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어딘가 느긋하고 초록빛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한 도시. 해외 파트너십을 넓힐 기회라는 명분 뒤로, 치앙마이에 대한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삭신은 쑤셔도 맥주는 달다



그러나 낭만은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 잠시 유예되었다. 인천에서 방콕 수완나폼으로, 다시 그곳에서 지루한 기다림 끝에 국내선을 타고 치앙마이로. 이동에만 꼬박 하루를 다 썼다. 분명 아침에 활기차게 출발했는데, 치앙마이 공항을 나서니 이미 도시 위로 어둑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설렘보다는, 삭신이 쑤시는 피로가 먼저 내 몸을 지배하는 기분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어디를 돌아다니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결국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맥주 한 병과 태국식 쌀국수 ‘꾸여이띠어우’를 주문했다. 맛은 지극히 평범했는데, 계산서의 가격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가성비의 천국인 태국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호텔 물가에 속이 쓰렸지만,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면 당장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어쩔 수 없이 마셨다.



한없이 평범한 음식을 부담스러우리 만큼 고급지게 먹고 마셨다



그래도 역시 ‘싱하(Singha)’ 맥주는 배신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맥주인데, 이상하게도 현지에서 마시면 다르다. 물이 달라서일까, 공기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여행’이라는 이름의 치사한 양념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역시 ‘로컬’이라는 강력한 MSG가 첨가되면 모든 풍경과 미각은 1.5배쯤 더 근사해 보이는 법이다.



공유 오피스에서 발견한 '게으른 창의성'



서둘러 저녁을 마치고 다음 날의 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든든하게 조식을 챙겨 먹고 첫 번째 목적지인 ‘스타트업스 인 레지던스(Startups in Residence)’로 향했다. 스타트업 보육 공간이자 공유 오피스인 곳이다.


솔직히 가는 길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공유 오피스라는 개념은 이미 한국에서도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터였다. 위워크나 저스트코 같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서울 도심에 즐비하지 않은가. 근사한 빌딩 속에 빼곡하게 놓인 책상, 무제한 제공되는 커피 머신, 그리고 세련된 척하는 회의실 몇 개. 그런 뻔한 그림을 예상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피스가 아니라 마치 휴양지인 듯한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빌딩 숲이 아니라 진짜 ‘숲’이었다. 드넓고 푸른 잔디밭이 먼저 시야를 가득 채웠고, 그 위에 낮고 널찍한 건물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공간을 빽빽하게 채워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조바심 대신, 일부러 비워둔 여백이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치앙마이 특유의 느긋한 바이브가 공간 전체에 눅진하게 묻어 있었다. 이곳의 시간은 서울의 시계보다 최소 두 배는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나무 그네에 실려 온 낯선 질문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그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 다가가 그네에 앉아 천천히 몸을 흔들어보았다. 회의실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모니터와 기 싸움을 하거나, 좁은 책상 앞에서 골머리를 앓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몸부터 먼저 무장해제되는 기분.


“와,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입 밖으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여유롭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사업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한두 달 푹 쉬러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 어쩌면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의 경계가 애초에 이렇게 느슨하고 말랑말랑해도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숲속 같은 공간에서 대체 어떤 회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내가 고수해온 ‘출근의 의무’ 밖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치열하게, 하지만 아주 우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편, '태국 치앙마이 : 디지털 노마드도 아무렴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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