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7
그래
오늘은 정말 잘 버텼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마침내 ‘한-태 4차 산업혁명 쇼케이스’의 막이 오르는 날이다. 그간 숱한 전시회를 치르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해 왔지만, 오늘 느끼는 압박감은 차원이 달랐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태국 총리가 나란히 방문하는 자리라니. “그저 형식적인 의전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여 봐도,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등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정장을 갖춰 입고 시연 장비와 팸플릿, 명함까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숙소가 있는 통로(Thonglo)에서 BTS 지상철을 타고 칫롬(Chit Lom)역으로 이동하는 내내, 창밖으로 흐르는 방콕의 풍경이 평소보다 훨씬 또렷하게 망막에 맺혔다. ‘오늘은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막연한 예감과 설렘이 묘하게 뒤섞인 아침이었다. 역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와 샌드위치로 서둘러 아침을 해결하고, 행사장인 방콕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사장의 외형은 여느 비즈니스 전시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소지품 검사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하게 진행되었고, 행사 진행 요원들의 날 선 눈빛과 정제된 움직임에서는 오늘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제 정말 실전이다.
우리가 배정받은 부스는 삼성전자와 나란히 ‘디지털 라이프’ 섹션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규모 면에서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공간과 화려한 디스플레이,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다수의 스태프를 거느린 삼성전자에 비하면, 우리를 포함한 스타트업들은 말 그대로 ‘구색을 맞추기 위한 들러리’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된 점은 7~8개의 참가 기업 중 우리 부스가 입구 쪽 가장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비즈니스든 전시든 일단 눈에 띄어야 기회가 온다.’ 첫인상의 힘을 믿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본 행사인 ‘한-태 비즈니스 포럼’이 열리는 동안, 우리가 있는 ‘4차 산업혁명 쇼케이스’장은 일종의 부대 행사처럼 운영되었다. 하지만 양국 정상이 직접 방문한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취재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KBS를 비롯한 국내 주요 방송사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고, 현장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태국 현지 언론사까지 합류하자 행사장 안은 관람객보다 기자가 더 많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부스를 찾은 이들에게 우리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와중에도, 등 뒤로는 수많은 카메라 렌즈와 마이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와 취재진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설명을 이어가다 보니, 내가 지금 제대로 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전 내내 쉼 없이 방문객을 맞이하다 보니 어느덧 양국 정상이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안내에 따라 참가사 전원이 포럼 회장으로 이동했다. 경비는 한층 더 삼엄해졌고, 자리에 앉는 순간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옆 사람의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질 만큼 엄숙한 분위기였다.
대형 스크린에는 대통령과 총리가 입장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그러다 화면 속 인물들이 문을 열고 실제로 내 눈앞에 등장했을 때, 비현실적인 고양감이 밀려왔다. 마치 TV 뉴스라는 가상 세계에 내가 불쑥 끼어든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니 오히려 현실감이 희미해지는 역설적인 순간이었다.
연설과 기념 촬영이 마무리되고, 드디어 VIP들이 쇼케이스장을 둘러보는 순서가 되었다. 우리는 부스로 돌아가려 서둘렀지만, 행사장 안은 이미 취재진과 수행원들로 꽉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행사장 스태프로부터 각 기업당 단 한 명만 부스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장외 대기를 자처하며 ‘대표이사’를 격전지로 보냈고, 친구는 VIP들이 운집한 전장(?) 속으로 비장하게 사라졌다.
로비 소파에 앉아 라이브 중계 화면을 지켜보며 내심 작은 기대를 품었다. ‘혹시라도 우리 부스 앞에 멈춰 서서 질문 한마디라도 던져준다면, 그건 우리 회사의 역사에 남길 명장면이 될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드라마틱한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공식 행사가 막을 내린 뒤, 통로(Thonglo)로 돌아와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온종일 안간힘을 쓰며 버텨온 피로가 몸 곳곳에 역력히 배어 있었다. ‘그래,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축의 의미로 친구와 함께 호텔 근처의 일본식 펍 스타일 스낵바를 찾았다.
그곳은 시원한 맥주나 칵테일을 즐기며 노래방처럼 리모컨으로 곡을 골라 부를 수 있는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처음 보는 타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게 다소 민망할 법도 했지만, 오히려 국적이 다른 외국인들뿐이라는 사실이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눈치를 살피다 슬쩍 마이크를 잡고 한국 노래 한 곡을 뽑아내자, 어색했던 공기는 금세 유쾌한 활기로 바뀌었다.
태국의 노래방 기계는 영어와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까지 폭넓게 지원하고 있었고, 최신곡은 아닐지언정 가요 라인업도 제법 탄탄했다. 일본인 손님들이 열창을 마친 뒤를 이어 태국인 커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애창곡을 불렀고, 곧 서양인들도 나름의 음정을 살려 노래를 이어갔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급기야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가 팝송을 떼창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그 순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낯설고 신기한 경험들로 꽉 채워졌던 방콕에서의 두 번째 날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오늘 하루, 참 뜨거웠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호텔로 돌아가는 길, 밤공기가 유난히 달콤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낯선 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그 짧은 용기가 마음 한구석에 기분 좋은 잔향으로 남았다.
어쩌면 모든 낯선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러운 익숙함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큰물’에 적응해가는 과정은, 그렇게 조금씩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다음편, '태국 방콕 : 여기에 있는게 맞나 싶지만서도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