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마이 : 디지털 노마드도 아무렴 2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60

by chill십구년생guy


우물안의 질서에 갖혀있으면
비참함을 낳을 뿐이라는



치앙마이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당장이라도 노트북을 던져두고 푸른 잔디밭 그네에 몸을 맡긴 채 신선놀음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엄연히 '출장' 중인 몸이다. 마음을 다잡고 '스타트업 인 레지던스(Startup in Residence)'의 공식 일정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Startup Thailand의 보육 기업들



시작은 한국에서 온 참가사들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함께 간 친구이자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얻어가고 싶은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어 ‘Startup Thailand’ 측의 비전 선포와 보육 기업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키워내고 있는 기업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마치 자식 자랑하듯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역시 어느 나라나 ‘육성’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그렇게 서로를 탐색하다 보니 오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카오소이, 이 도시의 성격을 닮은 맛



점심은 근처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로컬 식당으로 향했다. 메뉴는 치앙마이의 소울푸드인 ‘카오소이(Khao Soi)’. 진한 코코넛 커리 국물에 부드러운 쌀국수가 잠겨 있고, 그 위에는 바삭하게 튀긴 국수 고명이 올라간 독특한 요리다.


라임을 짜 넣고 샬롯과 피클 양배추, 그리고 호불호의 상징인 고수를 듬뿍 얹어 한 입 떴다. 이건 단순히 ‘맛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어디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감각의 대비였다. 부드러운 면발 사이로 튀긴 면이 바삭하게 씹히는 식감은 마치 정적인 줄만 알았던 이 도시가 품은 의외의 역동성 같았다.



카오소이와 함께 잔뜩 차려진 로컬 푸드의 향연



보통의 태국 쌀국수가 슴슴하고 순하다면, 카오소이는 훨씬 자극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첫 입은 낯설었지만 두 번째 입부터는 묘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득 ‘이게 왜 치앙마이 음식인지’ 알 것 같았다. 부드러운 듯하지만 자기 색깔이 분명하고, 느긋해 보여도 속은 꽉 차 있는 이 도시의 성격과 참 닮아 있었다. 역시 로컬의 맛은 그 땅의 사람들을 닮는 법이다.



대학교에서 느낀 ‘은밀한 유혹’



오후에는 치앙마이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설과 공방 형태의 ‘메이커스 스페이스’를 둘러보았다. 학교 차원에서 추진하는 산학 협력 모델에 대한 브리핑도 이어졌다. 그런데 설명을 듣다 보니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은근히, 정말이지 아주 은근하게 “한국 기업들, 여기 와서 우리랑 같이 해보지 않을래?”라며 손짓하는 분위기였다.



주최측의 일정에 맞춰 이곳 저곳을 둘러봤다



나는 이미 오전의 여유로운 오피스 분위기에 마음이 한 번 흔들린 상태였다. 여기에 대학과 지역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까지 확인하니, 내 안의 ‘전략가적 본능’이 꿈틀댔다. ‘여기서 뭔가 판을 벌여봐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치앙마이의 한적한 공기와 느린 호흡이 오히려 사업을 더 진지하고 깊게 고민하게 만드는 기묘한 아이러니라니.



몸집은 작아도 발걸음은 가벼운



저녁에는 다시 스타트업 인 레지던스로 돌아와 현지 기업들과 네트워킹 시간을 가졌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으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직히 냉정하게 말하면, 각 팀의 규모는 보잘것없었다. 대부분 한 명, 많아야 두 명인 초미니 팀들이었다. 꼰대의 눈으로 보기엔 파트너십을 논하기엔 너무 가볍고, 아직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곳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때린 건 그들의 ‘몸집’이 아니라 ‘발걸음’이었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앱으로 만들고, 조잡하게나마 프로토타입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 공간에 모인 동료들 앞에서 바로 시연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회의보다 실행이 앞서고, 완벽주의보다 속도감이 지배하는 생태계. 보고서 한 장 만드는 데 며칠을 허비하는 우리네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에너지였다.



새로운 관점으로 비즈니스를 바라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의 다양성이었다. 태국 현지인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아시아 전역에서 온 젊은 대표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의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특정 국가의 내수 시장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 세계’를 타깃으로 삼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가 몇 번 오가면 아이디어는 금세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서비스로 확장됐다.


부러움을 넘어 존경스러웠다. 어쩌면 이게 가장 이상적인 비즈니스의 미래가 아닐까. 한국에서 여전히 우물 안의 질서에 갇혀 있는 몇몇 모습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비교는 비참함을 낳을 뿐이다. 다만 이곳의 방식이 앞으로 세상을 지배할 보편적인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만은 또렷해졌다.



계속 치앙마이가 떠올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음 날부터는 방콕에서 전시회에 참가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노예인 출장자가 정해진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밤늦게 방콕에 도착해 익숙한 통로(Thonglor) 지역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함께 온 친구와 맥주 한 잔을 하러 나갔다. 방콕의 밤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낮에 본 치앙마이의 풍경으로 가득했다. 특히 그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일에 찌들어 생기를 잃은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 설렘으로 반짝이던 그 눈들.


맥주 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생길까. 태국은 이미 익숙한 나라였지만, 오늘 하루를 거치고 나니 같은 풍경도 전혀 다르게 보였다. 치앙마이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한 스타트업 캠프가 아니었다. 일과 삶을 대하는 또 하나의 방식,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고 현실적인 미래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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