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3
조심해서 나쁠게 없다는건
로마에서 충분히 배웠으니까
스타트업의 가장 강력한 승부수는 단연 ‘속도’다. 대기업에 비해 자본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실행력으로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다. 불확실성 속으로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 제품-시장 적합성(Product-Market Fit)을 증명하고, 압도적인 성장 지표로 투자자의 신뢰를 쟁취하는 것. 이것이 곧 스타트업의 숙명이자 생존 공식이다.
그러나 속도에 대한 맹신은 때로 위험한 함정이 된다. 빠른 움직임은 늘 크고 작은 리스크를 동반하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앞서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매몰되다 보면, 아직 채 열리지 않은 시장에 무리하게 발을 들이거나 설익은 비즈니스 모델로 스스로 자멸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누가 가장 빨랐는가’에만 매몰된 나머지, ‘언제, 그리고 얼마나 철저히 준비되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간과하곤 한다.
2019년 8월, 다시 찾은 독일에서 나는 이 냉혹한 진리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낯선 경험들은 스타트업이 ‘속도’라는 무기를 언제,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에 대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세계 최대의 게임쇼 ‘게임스컴(Gamescom)’ 시즌이 다시 돌아왔다. 작년 이 현장에서 사업의 이정표가 될 영감을 얻었던 나는(22화 참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공동관 참가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던졌다. 전 세계 게이머와 업계 거물들이 집결하는 그곳이라면, 이번에도 분명 새로운 성장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생의 마음으로 임하는 두 번째 참가인 만큼, 비즈니스 전략도 한층 치밀하게 짰다. 당시 맘모식스는 연말 TIPS 재도전이라는 중대한 관문을 앞두고 있었고, 우리가 개발 중인 신기술을 실질적으로 시장에 안착시켜 줄 글로벌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단순히 기술력을 뽐내는 수준을 넘어, 수익성을 증명할 비즈니스 모델의 강화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 무렵, 작년 게임스컴 인터뷰를 인연으로 꾸준히 교류해 오던 영국 게임 매체의 편집장에게서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최근 XR 광고 미디어 스타트업인 ‘ADMIX’의 부사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뉴스였다. 온라인 광고 기법을 가상현실에 녹여낸 ADMIX의 모델은 우리가 구상하던 수익 전략과 정확히 궤를 같이했다. 협력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이번 게임스컴 현장에서 만나 MOU를 체결하고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기로 뜻을 모았다.
두 달 전, 현장에서 발로 뛰며 파트너를 찾아 헤매던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번 독일행은 타깃을 명확히 설정하고 사전에 모든 밑그림을 그려둔, 철저히 계획된 승부수였다.
여정에도 약간의 변주를 주었다. 루프트한자를 타고 프랑크푸르트에 내린 뒤, 독일의 고속열차 ICE를 타고 쾰른으로 들어가는 루트를 택했다. 오로지 비행기로만 점을 찍듯 이동하던 지난 출장들과 달리, 이번에는 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유럽의 풍경을 감상하며 잠시나마 여유와 낭만을 만끽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이칠란트의 하늘로 몸을 실었다.
인천에서 14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에 발을 내디뎠을 땐 이미 해가 자취를 감춘 늦은 저녁이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지하철인 U-반(U-Bahn)에 몸을 실고 숙소가 있는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향했다. 연간 2억 명이 이용한다는 명성에 걸맞게, 밤늦은 시각임에도 중앙역 주변은 교통의 요지 특유의 역동성과 소란함으로 가득했다.
독일에서의 첫 밤은 중앙역 근처의 작은 호텔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곳에서 1박을 머문 뒤 다음 날 오후 쾰른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동행한 친구와 함께 허기를 달래러 거리로 나섰다. 시간이 늦어 선택지는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불이 켜진 카페 겸 레스토랑 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쉐퍼호퍼 바이젠(Schöfferhofer Weizen)'을 주문했다. 맥주잔이 테이블에 놓이기 무섭게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정통 독일 바이젠의 풍미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14시간의 비행 피로가 단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주방 쪽에서 익숙하고 고소한 향이 풍겨왔다. 메뉴판에서 ‘슈바인학센(Schweinshaxe)’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바삭하게 튀겨진 껍질을 칼로 가르는 순간, 육즙 가득한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2년 전부터 매년 독일을 찾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먹는 메뉴지만, 현지에서 맛보는 학센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예술 그 자체였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근처 골목을 거닐었다. 하지만 낭만적인 밤 산책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우리가 발을 들인 곳은 하필 홍등가였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아래를 서성이는 사람들 사이로 묘하게 거칠고 음산한 공기가 흘렀다. 예전 이탈리아 로마에서 겪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며 본능적으로 긴장감이 치솟았다. 결국 우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복귀했다.
“우리가 피곤해서 일찍 들어온 거지, 절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치?”
방으로 돌아와 친구와 마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긴장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전날의 비행 피로가 씻은 듯 가셔 있었다. 우리는 오전 시간을 활용해 시내를 가볍게 둘러보기로 했다. 밤에는 그토록 음산해 보이던 거리도 낮이 되자 활기찬 현대 도시의 얼굴을 하고 우리를 반겼다. 숙소를 나와 프랑크푸르트를 관통하는 마인강변까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강가에 흐르는 평화로운 공기를 마시며 벤치에 앉아 있노라니, 비로소 독일의 풍경이 눈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는 듯했다.
점심 무렵, 친구가 흥미로운 미식 체험을 제안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에리트레아 전통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아프리칸 퀸(African Queen)’. 동아프리카에 위치했다는 에리트레아는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였다. 먼저 주문한 맥주는 도수가 꽤 높았지만, 고소하고 진한 맛이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코코넛 껍질을 엎어놓은 듯한 바가지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는 방식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곧이어 나온 메인 요리는 시각적인 충격마저 선사했다. 커다란 접시 가득 고기와 채소, 나물들이 담겨 있었고 그 아래에는 회색빛을 띤 넓적한 빵 ‘인제라(Injera)’가 깔려 있었다. 푹신하면서도 살짝 신맛이 감도는 인제라를 손으로 뜯어 그 위에 반찬을 싸 먹는 방식이었는데, 인도 카레처럼 매콤하면서도 묘하게 입맛을 당기는 소스가 압권이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먹을수록 중독되는 독특한 풍미. 음식에 편견이 없는 친구 덕분에 뜻밖의 미식 세계를 탐험한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 한 잔에는 기분 좋은 설렘이 섞여 있었다. 곧 매끄러운 흰색 차체의 ICE(Intercity Express) 고속 열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목적지는 쾰른.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유럽의 드넓은 초원을 응시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드디어, 게임스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편, '독일 쾰른 : 딱 반 발짝씩 남들보다 빠르게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