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 2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51

by chill십구년생guy


실망스럽더라도 멈추지 않는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



도쿄에서의 둘째 날, ‘Korea IT Expo Japan 2019’ 현장은 여전히 열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예상치 못한 당혹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번 출장의 지상 과제는 단 하나, 새로운 해외 파트너십을 단 한 건이라도 더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비즈니스 문법은 내가 그간 익숙해져 있던 속도전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했다.


일본인들은 현장에서 즉각적인 결론을 내리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이라도 충분한 검토와 지난한 내부 협의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신중한 답변을 내놓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목이 쉬어라 대화를 이어가고, 공들여 준비한 자료를 펼쳐 보이며 열정적으로 데모를 시연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늘 한결같이 차분했다. 종일 쉼 없이 미팅을 소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늪 위를 걷는 것처럼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다는 초조함이 나를 엄습했다.



그래서 하겠다는거야 말겠다는거야



오후가 되자 한국 스타트업들의 피칭 세션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장염으로 고전 중인 친구에게 잠시 부스를 맡기고 발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대에 오른 나는 미리 외워둔 일본어로 조심스레 첫인사를 건넸다. 이어서 "일본어가 서툴러 부득이하게 영어로 발표하겠다"는 양해를 구한 뒤,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사실 나의 일본어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귀동냥으로 익힌 것이 전부였다. 여행지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가벼운 농담을 던질 정도는 되었지만, 비즈니스의 당위성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영어로 진행된 발표였음에도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 주었고, 그들의 진지한 눈빛을 확인하며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일본어로 유창하게 양해를 구하고, 영어로 발표하니까 뭐지 싶은 반응도 있었다



피칭을 마치고 부스로 돌아오니, 친구가 창백한 안색으로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서둘러 바통을 이어받아 미팅을 재개했다. 하지만 흐름은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다수 일본 담당자는 "회사로 돌아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들의 '긍정적 검토'가 실제 협력의 의지인지, 아니면 그저 일본식의 정중한 거절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모호한 답변들만 잔뜩 쌓인 채 하루 동안의 엑스포가 막을 내렸다. 손안에는 수십 장의 명함이 쥐어져 있었지만, 마음속에 남은 뚜렷한 확신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소주 한 잔



짐을 챙겨 행사장을 빠져나온 우리는 저녁도 해결할 겸 인근 긴자로 향했다. 목적지는 넓적한 면의 독특한 식감으로 유명한 '고다이메 하나야마 우동'. 따끈한 음식이 눈앞에 놓이자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레 오늘 미팅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일본에서 뭐 하나는 건질 줄 알았는데…." 아쉬움 섞인 내 말에 친구는 이미 두 나라에서 파트너십을 만들었으니 충분하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남은 묘한 답답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얇게 뜬 수제비와 칼국수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우동 맛



식사를 마치고 숙소가 있는 신주쿠로 돌아왔다. 친구는 장염 증세가 심해졌는지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며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적막해진 방 안에 혼자 남으니 답답함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이대로 잠들기엔 아쉬워 결국 다시 밖으로 나섰다. 발길이 닿은 곳은 내가 평소 애정하는 '마구로쇼텐'. 생참치 갈빗대 살을 숟가락으로 긁어 먹는 한정 메뉴와 산더미 같은 참치회로 유명한 집이다.


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참치회와 고구마 소주인 '구로기리시마' 한 잔을 주문했다. 잔을 앞에 두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음성통화를 하며 씁쓸한 속마음을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베트남과 태국에서 이어진 파트너십의 흐름을 도쿄에서도 완성하고 싶었다는 미련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할수록 아쉬움은 짙어졌고, 소주잔은 생각보다 빠르게 비워졌다.



혼자서 주절주절 떠들면서 제법 마셨다



기분 좋은 취기가 서서히 올랐다. 계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자, 참아왔던 피로가 폭포수처럼 밀려왔다. 눈을 감는 순간, 도쿄에서의 두 번째 밤이 그렇게 소리 없이 지나갔다.



혼자만의 힐링 타임



다음 날 아침, 친구의 상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침대에 누워 포카리스웨트로 연명하며 쉬겠다는 그를 뒤로하고 홀로 방을 나섰다. 우선은 쓰린 속을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일본에 오면 거르지 않는 해장 코스인 ‘이치란 라멘’으로 향했다. 다행히 오늘은 저녁에 예정된 현지 파트너사 미팅 외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낮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라멘 국물에 밥까지 말아 든든하게 속을 채운 뒤, 지하철을 타고 다이칸야마로 이동했다.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에 취해 천천히 거닐다가 단골 코스인 ‘츠타야 서점’에 들렀다. 일본어를 읽지는 못해도 세련된 잡지들과 감각적인 서가 레이아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은 제법 큰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서점을 나와서는 요즘 인기가 좋다는 에코백 매장에 들러 아내를 위한 선물을 하나 샀다. 문득 호치민에서 샀던 라탄백이 캐리어 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번 출장은 유독 가방만 잔뜩 사게 되는 묘한 징크스가 있는 모양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덧 나카메구로에 닿았다. 벚꽃 명소로 유명한 곳이지만, 초여름의 짙은 녹음이 내려앉은 풍경도 그에 못지않게 근사했다. '아오바야'에서 담백한 참치 아보카도 포케동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기찻길 옆 '오니버스 커피'에 자리를 잡았다.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니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제 종일 나를 괴롭히던 아쉬운 감정들도 조금씩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산책 하고, 쇼핑하고,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이게 바로 힐링



‘그래, 늘 성공할 순 없는 법이지. 어찌 됐든 난 최선을 다했으니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는 것과 일을 놓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어제 만난 업체 담당자들에게 부스 방문에 대한 감사 인사와 회사 소개서를 담은 메일을 한 통씩 정성스레 보냈다. 아무리 실망스러운 상황이라도 멈추지 않고 씨를 뿌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결국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편, '일본 도쿄 :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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