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여행에 관한 책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쓰지 않았다기보다 쓰지 못한 쪽에 더 가깝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사람은 제각기 마음 깊숙한 곳에 우물이 있다.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속에 나오코의 우물처럼 짙고 깊은 우물이 가슴의 멍처럼 남은 사람도 있고 보통은 내 마음에 그런 우물이 있는지 의식도 없이 평생을 살아간다. 나에게도 우물이란 게 있다. 그 우물은 깊고 짙은 숲 한가운데에서 때때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나를 긴장시켰다. 누구도 알지 못할 기쁨과 슬픔이 우물에서 차올라 여름철 장마처럼 변덕을 부렸다. 한때는 이 우물이 메마르기를 간절했던 것 같다. 이제는 간절하지 않아도 그 우물은 더 이상 차오르지 않는다. 글을 다시 써보겠다고 텅 빈 우물에 헛두레박질을 해대며 이제는 우물이 말랐음에 허탈해한다. 넘쳐도 문제 메말라도 문제인 게 감수성(sensitivity)이다.
지난해 6월 어느 날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하루키를 자꾸 말하게 되는데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도 달리기를 평생 할 수 있을지 하는 물음이 생겼다. 하루키처럼 평생 달리기와 글을 쓰며 사는 삶이 균형 잡혀 보였고 고요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가에게는 콤플렉스로 누군가에게는 상처라는 이름으로 달고 사는 우물을 메마르도록 덮지 않고 달리기로 펌프질 하고 글로 퍼올리는 하루키가 질투가 났다. 그의 우물을 품은 숲은 짙고 푸르러 보였기 때문이다. ‘토지’의 서문에 적힌 박경리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삼 년간의 집필로 토지의 1부를 마치고 이 작품을 끝까지 써내려 가야 하는 긴 여정을 대하는 선생의 마음이 글로 담겨 있었다. 평생 이어가야 할 일을 앞에 두고 박경리 선생님은 자신에게 묻는다.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달리기를 시작하며 그렇게 비장할 이유가 있을 만한 구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그런데 남은 생은 달리기를 계속해보는 게 어떤지 나에게 물었고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우선 달리는 일을 제대로나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몸 상태로 그런 거창한 물음은 너무도 가벼운 질문이 돼버렸다. 이 육중한 몸이 허공에서 다리를 바꾸어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몇 발작을 뛰었을 뿐인데 내 무릎은 저항했다. 어느 날 이제 달리기를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길 위에 서 있던 순간의 나는 비장했다. 나는 결국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지 차오르는 숨을 견디지 못하고 방어할 것인지 도전 끝에 비약은커녕 몸만 망가뜨리고 말 것인지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순간에 한 가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달리기가 내 메마른 우물에 물을 끌어오는 마중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드럼을 배워보겠다고 홍대 근처 드럼학원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첫 수업에 드럼을 가르쳐 주던 선생님은 단 한마디였다. ‘드럼은 아주 느린 속도로 일정하게 북을 치는 대신 두드리는 게 전부입니다.’ 그날 이후로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북을 두드렸다. 아주 느리지만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는 일이 쌓이면 어느 순간 노래에 맞추어 드럼을 두드리는 순간이 온다. 그때를 떠올리며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아닌 아주 느리게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몸을 움직여 갔다. 속도와 거리로 달리기를 평가하는 대신 얼마 동안 달리기를 유지하는가에 신경을 썼다. 솔직히 하루키가 달리기를 대하는 태도를 읽고 나와는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달리기를 시작했으면 마라톤 풀코스는 뛰어야 하고 게다가 서브 4 정도의 기록은 도전해 봐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보통이고 정상이다. 이걸 보통이고 정상이라고 하면 그 정도는 엄두는커녕 생각도 못하는 나는 보통이 아닌 열등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보통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달리기라는 기술을 늘리는 대신 오늘 하루 정해진 시간만큼 나만의 리듬으로 유지한다는 마음으로 아주 느리고 일정하게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나 자신을 친구 삼아하는 일을 선호한다. 남과의 경쟁이나 나와의 처절한 싸움을 확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도 팀 라이딩은 하지 않고 달리기도 크루 속에 끼지 않는다. 등산을 해도 혼자서 산에 오르고 패키지여행은 다녀온 적이 없다. 나 자신과의 대화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혼자서 하는 놀이에 빠져 사는 게 아니다. 남과의 경쟁이 싫을 뿐이다. 지면 물론 마음이 상하지만 그렇다고 이긴다고 기쁜 마음도 없다. 성격이 좀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 40대 이전까지는 이런 나의 성향을 숨기고 살아왔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일도 있다. 지금은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간다. 별 재미도 없는 요가를 몇 년간 꾸준히 해오는 것을 보면 나는 여러 선택지 중에 혼자 놀기를 택하는 편이 확실하다. 그런 성향 탓에 혼자서 새벽길을 달리는 일이 점점 친숙해졌다. 드럼도 처음에는 느리고 일정한 리듬을 계속하다 보면 빠른 템포의 곡을 두드리는 날이 온다. 달리기도 마찬가지이다. 느리고 일정한 리듬은 점점 케이던스가 올라가며 경쾌한 리듬의 구간을 달리는 자신을 경험한다. 하루키는 폴리 리듬으로 달린다고 표현하는데 일정한 리듬 속에 몸이 얹힐 때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조금은 짜릿한 느낌을 겪는다. 이 맛에 혼자 달리는 일을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달리기를 마치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날에는 달리기를 시작할 때 가졌던 비장한 무거운 마음은 다 잊고 남은 인생 계속 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한없이 오만한 가벼운 마음을 담고 집으로 향한다.
영하의 날씨에도 달리기를 한 시간 정도 지속하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몸이 땀으로 젖는 순간부터 메마른 우물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우물을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촉촉이 젖어오는 순간 밤새 늘어진 꽃이 물을 먹고 일어나듯 생기를 되찾는다. 몸이 젊고 생기가 있을 때는 정신이 몸에게 함부로 대하더니 몸이 무너지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정신이 쩔쩔맨다. 서로 입장이 바뀌니 정신은 이제 몸 챙기기 바쁘다. 무슨 오지랖인지 주변 사람의 몸까지 걱정하고 챙긴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육 개월이 지나고 글 한 줄을 적기 시작했다. 마를 대로 말라서 더 이상 퍼올릴 말이 없던 우물에 살짝 물기가 보였다. 글은 엉덩이와 발로 쓴다. 글쓰기는 발이 움직이며 보내온 신호를 엉덩이가 견디고 자판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글을 쓰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일은 아니다. 달리는 일은 순수함에 다가서는 일이었다. 걸음마를 떼고 달리던 그 순간부터 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할 수 있는 몸짓이다. 딱히 돈을 들여 배울 운동도 아니고 옷을 치장하고 나가 뽐낼 일도 없고 내기를 걸고 죽고 살기로 덤비지도 않는다. 오로지 호흡에 집중하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내딛는 순간의 반복이 전부이다. 그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느낀다. 숨차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 나는 아직 달릴 수 있는 사람임에 희열이 차오른다.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조금은 불편했다. 그는 마라톤 풀코스의 기록에 무게를 두고 철인 3종경기를 준비하는데 열을 올린다. 그가 그토록 열광한 달리기에 기록이라는 숫자를 적으니 달리기는 동물의 순수한 몸 짓이 아닌 스포츠 중의 하나였다.
나는 과연 달리기를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달리기와 걷기 중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빨리 걷는 속도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걷는 것은 아니다. 걷는 것과 달리는 일은 다르다. 어느 날 달리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달리기를 하는 날 벤치에 앉은 할머니들은 아마 웃었을 것이다. 젊은 놈이 그리 못 뛰나 하는 웃음이 귀에 들리는 듯했고 뒤이어 성큼성큼 나비처럼 날아가는 할아버지 러너가 나를 지나 거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앳된 여자의 가벼운 잰걸음은 발에 모터를 달아 놓은 듯했다.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달리기를 한다. 백 미터도 가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이때부터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 혼자서 혼자만의 천천히 달리기를 즐겼다. 그 천천히 달리는 일도 계속하니 내 몸에 익숙해져 천천히 달리는 리듬이라는 게 생겼다. 할머니가 웃던 할아버지가 나를 추월하던 여자들의 뒤꽁무니만 보게 되던 나만의 리듬을 가지고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단풍이 번지는 순간을 느끼며 달렸다. 단풍이 물든 나무 사이로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법 차가워진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달리는 리듬에 맞춰 시야에서 다가오고 멀어지는 단풍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내 뒤에서 어는 여자분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사라졌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오늘 달리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천천히 달리는 것에 용기를 내고 내 속도에 맞춰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진짜 달리기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