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하루는 꽃눈이 내린다. 새하얀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면 옆에 있는 청단풍 어린잎들도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어댄다. 꽃은 땅에 내려앉고 바람 부는 대로 구르고 잠시 머물렀다 바람 짓에 다시 휩쓸려간다. 싱그러운 연둣빛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꽃눈을 보며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군가도 벚꽃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었다. 벚꽃이 신작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길옆에 폭이 제법 있는 개천이 반듯하게 흘렀다. 낮보다 밤에 벚꽃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 더욱 많았는데 아름드리 벚나무의 탐스런 꽃들이 사람의 마음을 밤에 더욱 사로잡았다. 집 옆에 벚꽃 명소가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불편한 일이 더욱 많았다.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벚꽃 구경 나온 차들로 막혔고 조용한 마을이 상춘객으로 가득한 일도 반갑지 않았었다. 어제는 차를 운전하며 인디밴드 10cm의 노래를 들으며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딱 이 마음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일제히 벚꽃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렬로 늘어선 벚꽃들이 개천 위로 흰 꽃잎이 날리는 장관은 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상춘객들이 봄꽃의 끝물이라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에 맞추어 집을 나와 강둑 위를 걸으며 꽃눈에 하얗게 뒤덮인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흰 눈을 쏟아부은 듯한 강물이 강둑 위를 걷는 나보다 더디 흐르기를 바랐다.
꽃이 좋냐 물으면 십 대 일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꽃은 너무 빨리 져버려서 허무하다. 많이 좋아하고 정 주었는데 한 학기도 안 다니고 전학 가버린 친구처럼 서운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화분에 심을 화초를 고를 때에도 꽃이 지고 난 후의 잎 모양을 상상하며 화초를 고른다. 골라서 심다 보니 베란다의 화분들에 심은 화초의 잎들이 제각각이다. 작고 크고 길쭉하고 넓적하고 앙상하고 덥수룩하고 머리털 같고 앙증맞은 잎과 가지를 보고 있으면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아이들 같다. 이 화분들이 서로 잘난 체하지 않고 베란다에서 햇볕을 사이좋게 나누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흐뭇하다. 만병초, 무늬 천리향, 기린초, 청매화 붓꽃, 미스김 라일락, 무늬 꽃다지, 섬노루귀, 땅콩 사랑초, 아네모네, 초설 마삭, 크로키아, 동백, 아이비 등 지난겨울을 잘 보내고 꽃을 피운 녀석도 있지만 꽃을 올리지 못하고 말라버린 화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벤치에 앉아 봄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꽃보다 여린 연두 잎들에 더 눈길이 간다. 봄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바들바들 떨며 조금씩 몸을 키워가는 녀석들이 대견하다. 성장해 가는 일은 고되지만 아름답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큰 사업하기는 틀린 모양인 듯싶다. 돈 버는 일은 그냥 고되기만 하다. 대신 먹고사는데 지장만 없으면 여행을 가고 싶다. 사람들이 사는 구경도 하고 낯선 땅에서 엉뚱한 일에 부딪히며 시시덕거리고 싶다. 세상이 온통 꽃이 한창인 봄인데 카페 한구석에서는 주식과 부동산으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어쩌다 맘 편히 봄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을고’
만나자고 연락 오는 사람들은 최근에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엔가 자신의 근황을 말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만나보면 십중팔구는 맞다. 별일 없이 지낸다고 운을 떼고 삼십 분 넘게 말을 이어간다. 그러면 나도 맞장구를 치는 척하며 나의 운 좋은 날을 말하는데 열을 올린다. 우연히 서로의 욕망의 깊이만 재고 있을 때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들었다 사라졌고 봄꽃은 시들거나 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정작 이 아까운 봄은 돈이 무슨 소용이냐던 농땡이 친구 차지가 되어 버렸다. 어느새나뭇잎은 여름의 신록으로 커나간다. 봄이 없다거나 짧다고 여긴다면 지금 봄은 누구 차지인지 되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