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에서 방금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약사에게 건넸다.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을 정도로 관절 주위가 아픈 일이 점점 잦아졌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말했듯이 젊었을 적에는 몸이 만만한 벗이었는데 나이 들어서는 점점 나에게 삐치고 돌변해간다. 이십 대에는 지리산을 무박 종주해도 괜찮았던 무릎이 며칠 걷는 재미에 빠져 지냈더니 나에게 성내고 시큰거렸다.
유독 잠이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본다. 잠이 많았다기보다 밤에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가끔 창문을 열고 밤벌레 소리를 들었던 탓에 늦잠으로 부모님의 애를 태웠었다. 아침에 알람시계는 무용지물이었다. 한 번 잠에 빠지면 길게는 12시간도 거뜬히 잤다. 그랬던 잠이 요즘은 새벽에 깨어나 다시 잠들기 어렵다. 낯선 곳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고질병 탓에 웬만하면 숙박하는 출장은 되도록 조정한다.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낯선 곳에서의 잠은 항상 곤욕이었다. 그래서 짧은 여행보다는 잠자리 적응을 할 정도의 장기 여행이 나에게 맞았나 보다.
오우아(吾友我)는 ‘나는 나를 벗 삼는다’는 의미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떠오르는 이 말이 봄길 걷는 내 발걸음의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혼자서 걷다 보면 나는 누군가와 계속 이야기를 했다. 한때는 그 사람과 끊이지 않는 다툼을 벌였었다. 질책과 책망이 앞서고 배려와 사랑은 뒤따르지도 않았다. 벗이란 배려와 사랑이 앞서고 충고와 조언을 울림으로 남겨 놓는다. 젊은 날의 나에게 진짜 벗이 되어주지 못해 용서를 구한다. 나이 들어가며 상전이 되어가는 육신과 잠들기 어려운 새벽 시간은 불편하다. 하지만, 나이 먹어가는 일이 아주 밑지는 장사만은 아니다. 나는 나를 벗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다시 모이기 시작한 친구들과 친구로 지내는 법을 새삼 다시 알게 되었다.
사실 말이야 쉽지 아는 만큼 산다는 일은 녹녹지 않다. 나는 대부분 나를 종처럼 부리고 아주 가끔 벗으로 대한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아주 가끔 이성적이다. 내 안의 욕망들과 싸우지 않고 지나는 하루가 없다. 그런데 정말 싸우기는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자문해 본다. 인간의 욕망과 싸우는 만큼 승산 없는 게임도 없어 보인다. 내 안의 벗은 가끔 나에게 친근하고 자주 나와 맞선다.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의 굴레 속에서 오늘도 살아간다.
확실히 오늘은 마음이 종잡기 어려운 날이다. 봄바람이 불어서이기도 하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큰 것도 한몫한다. 몸이 들쑥날쑥하니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것이라고 선무당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변덕스러운 봄바람에 꽃이 핀단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스러운 마음이 없으면 지금의 ‘나’라는 꽃도 없었을지 모른다. 변덕을 부리면서도 투정을 하면서도 시험 준비를 하고 출근 지옥철에 오르며 사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어제는 사랑한다고 열다섯 번을 말하다가도 오늘 한 번의 토라짐으로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마음이 스물 거리는 게 사람 마음이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구절이 떠오른다. 그러니 그 변덕스러운 마음을 그리 야박하게 탓하지는 말자. 어제의 말을 내뱉은 대로 오늘을 사는 이는 내가 누군가로부터 어디선가 주워들은 사람이다. 정작 내 옆에 있는 친구는 오늘 한 말을 내일에 살아보겠다고 수없이 다짐하는 사람이다. 어제는 지난 말을 번복하며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걸 어쩌겠냐고 반문하는 친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말이다. 너에게 했던 그 말은 타인에게는 추상처럼 엄하고 나에게는 훈풍처럼 관대한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어쩌면 너는 꽃이고 나는 심술궂은 봄바람일 테다. 꽃은 흔들리며 피어나는 존재이고 봄바람은 불어 닥치고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