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대로
명당자리를 잃은 나는 카페인을 충전하러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상냥하신 사장님과 커피맛도 좋아서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오고 싶은 곳이었다.
" 혼자 오셨어요? 혼자 여행하면 무섭지 않아요? "
"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만, 괜찮아요! 안 그래도 해 지기 전에는 숙소에 들어가려고요."
걱정 섞인 사장님의 질문이 고맙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제주의 밤을 혼자 누릴 만큼 용기가 없다. 내가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별이 떠있는 제주 밤바다에서 회 한 접시와 소주 한잔의 낭만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 용기의 문제일까 성향의 문제일까?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엔 아쉬워서 근처에 <왈종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간과한 점이 있다. 나는 길치다. 지도를 봐도 항상 반대로 걷는 방향치는 옵션이다. 그 둘의 결과물은 나를 <왈종미술관>이 아닌 <서복전시관>에 데려다 주었다. 공원 매표소가 따로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위치를 잘못 본 것이 화근이었다.(이상하면 좀 물어봐라. 제발! ) 갈길이 바쁘지만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온 것이 아깝기도 하고 작은 전시관을 둘러보는데 얼마 안 걸릴 것 같아 10분만 관람하기로 스스로와 합의했다.
기대 없이 들어간 곳에서는 뜻밖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중 흥미로웠던 것은 서귀포의 지명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서복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기 위해 한라산까지 왔다가 떠날 때 정방폭포에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서불이 서쪽으로 돌아갔다)을 써놓고 간 것이 서귀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의 불로초를 여기서 만나다니! '서복 왔다감!' 같은 낙서가 한 지역의 지명이 되었다니! 의도하지 않은 채 마주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무계획의 묘미지! (하하하). 우연은 모험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다.
생각지 못한 즐거움에 시간이 지체되어 서둘러 왈종미술관으로 향했다. 한번 헤매고 나니, 제대로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왈종미술관은 정방폭포 바로 뒤에 있었다. 야외 조형물들이 즐비한 입구를 지나 미술관에 들어가 느낀 마자 느낀 것은, 따뜻함과 행복함이었다. 이중섭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의 색감과 질감 그리고 순수함이 제주스럽게 느껴졌다.
제주도에서 작품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의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시리즈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림 중간중간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쓰여있는 문장은 울컥하기까지 했다. 퇴사 후, 싱숭생숭한 마음을 잡기 위해 온 제주인데, '그 마음 다 안다, 다 괜찮다.'며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퇴사'. 이 단어의 무게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직서를 쓰고 지우기를 몇 번, 이 길이 옳은 걸까 라는 고민을 수십 번, 퇴사 후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한 수백 번의 마음을 한방에 시원하게 씻어내려 주는 마법 같은 문장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게 인생이지.
어쩌면 무계획이라는 계획을 세운 것도, 목적 없이 흘러가는 인생의 불안함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계획을 계획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일단 움직여 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었다. 그 움직임이 앞으로 나아가게 할지, 뒷걸음질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이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전시관을 둘러보고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마침 해가 지고 있는 중이어서 하늘이 온통 분홍 빛으로 물들었다. 그림에서 보았던 따뜻한 색감을 실물로 마주하니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한 날씨와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제주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잘 왔다고 환대해 주는 것 같았다.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 우연의 순간에서 위로를, 아름다운 일몰로 황송한 환대를 받은 멋진 하루.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 정착하여 20여 년이 넘게 나는 <제주생활의 중도와 연기>란 주제를 가지고 한결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도대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 만을 깊게 생각해 왔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보았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란 생각도 해봤다. 살다 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일생을 걸었다. 사랑과 증오, 탐욕과 마음, 번뇌와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모두가 다 마음에서 비롯됨을 그 누구나 알지만 말처럼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마음이 내재하는 한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흰머리로 덮여가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구속, 사랑과 고통, 외로움 등을 꽃과 새, 물고기, TV, 자동차, 동백꽃, 노루, 골프 등으로 표현하며 나는 오늘도 그림 속으로 빠지고 싶다.
2013.5. 서귀포 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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