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같은 사람
벌써 셋째 날. 무계획의 여정 속 계획이란 것을 세워본 오늘은 어젯밤 예약해 두었던 '세컨드뮤지오'에 가는 것이 목표이다.(코로나 시국인 요즘은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임태수 작가의 <브랜드적인 삶>이라는 책에서 알게 된 곳인데, 서울에서 내려온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겸 빈티지 편집숍이다. 이곳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 공간의 슬로건 때문이었다.
'Make your own house as second muso.' '세컨드뮤지오 처럼 집을 꾸며보세요'라고 해석되는 동시에 '당신의 집을 두 번째 미술관으로 만드세요'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임태수-브랜드적인 삶. 72p>
이 공간의 목적과 취지, 그리고 지향하는 방향성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 궁금했다. 서귀포에 숙소를 잡게 된다면 꼭 가야겠다 싶었는데 첫 번째 숙소가 서귀포였고, 또 마침 새로 이사한 공간에서 재오픈 소식이 들려 운 좋게 타이밍을 맞춰 갈 수 있었다.
숙소에서 보도 30분 거리에 위치하여 '이 정도면 걸을 만 하지' 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날씨는 어제보다 쌀쌀했지만, 따뜻한 햇볕과 푸른 하늘이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낯선 건물을 익히고, 귤나무와 야자수가 즐비한 도로와 길을 걷는 것이 마냥 신기해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걷는데 뭔가 이상했다. 30분 거리에 있다는 세컨드뮤지오는 20분을 걸었는데도 절반밖에 오지 못한 것이다. 의아했지만, 걸음이 느린 것을 탓하며 예약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더 부지런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멈춰서 다시 찾아봤어야 했는데... 지도를 의심했어야 했는데... 이마에 맺혔던 땀은 등줄기까지 내려갔고, 결국 사장님께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드렸다. 지도가 안내해주는 길을 걷고 또 걸어 1시간가량을 걸어 드디어 도착했다고 생각한 곳에는 이사 전의 건물이 눈앞에 있었다. 띠용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안타까워하시며 천천히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지나버린 시간과, 다시 걸어서 이동하려면 또 30분을 되돌아 가야 했으므로, 맥이 빠져 지쳐버린 심신에게는 '걷기'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쓸모없는 자책을 했다. 나는 왜 이럴까(내가 그럼 그렇지 뭐)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택시를 탈걸...(하지만 택시를 탔다면 오는 길의 예쁜 풍경들을 못 봤겠지...) 미리 가는 길도 지도로 찾아보며 나름 준비했는데, 오들도 어김없이 우당탕탕을 한 건 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너의 인생은 참 시트콤 같다고 말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세컨드 뮤지오는 사장님이 안쓰러운 얼굴로 맞이 해 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애용 한 지도 어플은 업데이트가 느려 이사한 주소가 반영이 안 되어 있었던 것. 때문에 이 어플을 사용한 고객들은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그 어플을 삭제했다.)
한숨을 돌리고, 카페 사장님이 로스팅하셨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직접 만드셨다는 담백하게 달달한 티라미수를 무섭게 흡입했다. 떨어진 당 보충을 하고 나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만든 그림자는 그것마저 카페의 일부 같았고, 카페와 편집샵 쇼룸을 블라인드 하나로 무심하게 구분해 놓은 것이 멋스러웠다.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녹색 삼나무들과 귤나무 밭,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학교 종소리가 이곳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처음엔 사장님 핸드폰 벨소리인 줄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이사로 인해 책에서 읽었던 공간이 아닌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사장님 부부가 터를 고르고, 설계부터 닦아 만든 이 공간이 너무 근사했다.
원래 낯을 많이 가려 뭔가 물어보고 질문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용기가 나서 사장님께 가구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하시던 일 까지 멈추고 도슨트를 해주셨는데,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처음 둘러볼 때에는 '특이한 소품'에 불과했던 가구, 조명, 오브제들이 그 소품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사장님이 직접 수입하셨다는 찬디가르의 아름다운 색을 담은 사진집, 인간이 지구로부터 우주 공간에 진출하는 스페이스 에이지 시대(1960~1970)에 만들어진 디자인부터 재질까지 유니크한 책상과 의자, 클래식한 클로버 모양 장식의 열쇠가 있는 잠금장치 서랍장,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원기둥 형태의 화장대였다. 원기둥모양의 화장대라니! 비범하게 생긴것 과는 다르게 화장대의 구성은 거울과 수납장으로 일반 적인 화장대화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화장대의 하이라이트는 뒷면에 있다. 360°회전이 되는 화장대를 회전하여 뒷면의 손잡이 홈을 양쪽으로 오픈하면 비밀의 공간이 나온다. 바로 옷을 걸 수 있는 행거! 화장대 뒤에 행거라니? 화장대의 기능을 넘은 이 실용적인 디테일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게 정말 제작된 지 50년도 넘은 가구라고요?) 디자인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좋은 자재와 가공으로 100년 사용도 가능하고, 실용성까지 겸비한 제품들을 보면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것들은 가구가 아니라,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다. 이제야 세컨드뮤지오 슬로건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이해가 되었다.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과,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의 받아들이는 차이는 정말 크다.
요즘은 트렌드에 맞게 빨리빨리 바꿀 수 있는 값싼 제품, 편리하고 좋은 기술로 만든 가구나 제품들이 쏟진다. 쉽게 살 수 있고, 고장 나거나 망가지면 버리고 또 사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시된 지 오래되고 사용감이 있는데도 비싸기까지 한 이 빈티지 가구들을 왜 찾고 좋아하는지, 어디서 매력을 느끼는지 알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획일화되지 않고 구석구석 섬세하고 실용적인 것이 오래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오랜 세월에도 매력을 잃지 않고 빛나는 아름다움이 너무 멋지다.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알게 된다. 애정을 담아, 시간을 들여 깊게 오래 만나고 싶은 사람인지, 당장에 좋아 보여도 적당히 거리를 둘 사람인지, 흘려보낼 사람인지. 빈티지 가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티' 나는 사람 말고 '빈티지' 같은 사람.
시간이 흘러 낡아질수는 있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오래오래 만나고 싶은 사람.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세컨드뮤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