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국민학교 2학년 때였나. 성격의 순진함과 뇌의 순박함이 교차하던 시절. 나는 우리나라 말이 만능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딱 봐도 미국 사람들이 토요일 주말이면 유창한 한국어로 <주말 명화 극장> 같은 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빙이라는 존재를 몰랐던 그 시절. 난 영어도 우리나라 말과 똑같다 믿었다. 모든 외국어는 한국어라 같은 거구나. 어떻게 보면 그 시절의 생각이 지금의 어학에 대한 생각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촬영’이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도 이때와 비슷했다. 드라마를 보면 다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야기 같은데,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모든 집에는 몰래카메라(지금의 CCTV 개념이랄까)가 달려 있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가족의 모습이 TV에 방영되는 줄 알았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조금 달리 해석했던 것일까. 아무튼 그래서 한 육 개월 정도는 의식적으로 집에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재미있게 행동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무언가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내 백치적 행보는 산타클로스에서 절정을 찍는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솔직히 뭐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무튼 그것이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12월 25일 아침에 그 선물을 받자마자 아파트 베란다로 달려 나가서 “산타할아버지 고맙습니다.”를 외치던 나를, 아파트 윗집 옆집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을 겨우겨우 막으셨던 우리 어머니를 (솔직히 그때까지 동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지) 기억한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처음으로 집이 아닌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던 1996년, 중1에서 중2넘어가는 그 크리스마스에서야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습득한 거지. 그러니까 우원재가 조우찬한테 산타는 없거든 한 것은 정말 잔인한 이야기다. 잔인한 자식.
그렇게 인생을 살다 보니 어느새 20대가 되고, 30대도 어느 순간 중반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귀여웠을지 몰라도 지금은 징그런 아재가 되어버렸고, 그때의 순진함이 마음속에는 남아 있더라도 표면으로는 표출하기 힘든 그런 사회적, 자아적 존재가 되고 말았다.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마추어나 하는 일이라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보여주고, 내가 그래도 동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술을 마시는 것 같다. 결국 내일 아침에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돌아가고 싶거나, 나아가고 싶거나 하는 존재다. 현실은 진짜 시궁창같이 힘드니까. 미래는 과학이 해결할 문제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술 한 잔이면 가능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남들은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많이 겪어봤고, 또 다른 이의 인생을 급속으로 배우기도 했다. 특별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냐만,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인생이 가장 특별하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특별한 인생을 살아왔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인생이 더 특별하겠지만, 난 그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다시 옛날로 돌아가 보자. 나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60 갑자의 첫 시작인 갑자년인 1984년도에, 12 간지의 시작인 쥐띠로, 일 년의 시작인 설날 당일에, 하루의 시작인 자시에 태어났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시집살이 빡쎄게 하던 어머니가 차례 준비하시다가 급하게 병원에 오셔서 진통을 하시다 출산한 사람이 나란 이야기다. 대구빡은 ‘오살라게’ 커서 막 출산된 신생아의 전체 체형에서 대가리가 2/3 정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 내 어머니의 회고이시다. 이제야 말하지만 정말 고생하셨다. 효도해야 하는데 잘 안된다.
기억이 조금 생길 무렵에 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여기저기 아파서 약을 많이 먹었던 기억도 난다. 어머니께서 무등 도서관에서 항상 책을 빌려주셔서 책도 많이 봤던 기억이 난다. 호돌이의 세계 여행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왠지 모르게 최루탄 냄새가 유일한 향기의 기억이다. 내가 84년 생이니, 기억이 있으려면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일 텐데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복도형 아파트라서 재미난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우리 집이 305호였는데, 309호에 사는 놈이 동생을 때려서, 내가 식칼 들고 달려 나갔던 기억도 난다. 돌이켜 보면, 난 참 과격주의자였다. 어떻게 그런 폭력적인 짓을 할 생각을 했을까. 306호에 살던 아이는 나랑 동갑이었는데, 벼르고 벼르다가 한 번 깨문 적도 있다. 대현아, 미안. 406호에 살던 딸 둘이 있던 집 아이들은 아직도 가끔은 연락이 되는데 솔직히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수준이다. 광주에 있는 동산 훼밀리아파트, 몇 년 전엔가 가봤는데 어렸을 때는 정말 커 보였던 그곳이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키는 그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눈만 높아졌나 한참을 생각했다.